한대수..
한국에 제대로 된 청년문화가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70년대초 미국의 히피 청년문화에 영향을 받은 문화가 꽃필려던 시절이 한번은 있었기는 했다. 하지만 피기도 전에 져버렸다. 그 일찍이 꺾여버린 청년문화에 대한 정설로는 유신의 시작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저항의 냄새가 풍기는 대학문화에 대한 탄압으로 이야기되고 그 한복판에는 지금은 완전히 기성세대가 된 김지하와 김민기가 있었다.
야사로는 박대통령의 아들이 대마초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을 타락시킨 친구들이 전부 히피들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장 퇴폐문화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엄청난 양의 검열을 동반한 탄압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고 그 한복판에는 한대수와 신중현이 있다.
신중현과 더불어 한국 대중음악의 두 뿌리 중 한 명인 한대수, 잊혀져 있던 그가 우리에게 다시 조명이 된 것은 일본의 Crossbeat Asia의 초청을 받아 일본 락의 여왕인 카르멘 마키와의 조인트 콘서트인 1997년 9월 후꾸오까 라이브를 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기획자인 강신자의 말을 인용하면 그의 인생과 음악 자체를 집약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미국의 반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일본과 한국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의 젊은이들 앞에는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경관에게 머리를 잘릴 수도 있었다.
군인출신의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질식할 듯한 공기가 가득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의 노래는 혼란의 주범으로 몰려 금지처분되었다. 게다가 대마초 일제단속으로 많은 가수들이 체포되었다.
한대수가 한국을 떠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그는 노래를 계속하기 위해 나그네가 되기를 선택했다. 안주할 땅을 갖지 못한 정신적 유배자로서 자유롭고 고독한 나그네의 혼이 뿜어내는 아름답고 끊이지 않는 노래를 계속 불러왔다."
한국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간 후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히피가 되어 귀국한 후 첫 음반 [멀고 먼 길]을 내었다.
이 음반에는 그가 18살 때 만들었다는 <행복의 나라>와 <바람과 나>라는 한국 포크음악의 명곡과 아프리카 악기인 카주 소리를 그의 목소리만큼 격렬하게 토해내는 <물 좀 주소>가 나왔다.
신세계 음반에서 나온 이 데뷔앨범이 한국의 대중음악사에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행복의 나라>는 당시 포크가수라면 의례히 음반에 한 번 정도는 넣어서 불렀고 자작곡만을 부르는 가수인 김민기도 <바람과 나>만은 그의 음반 속에 담았다.
이 당시 그를 본 양희은은 "버스 안에서 명륜동에서 지나가는 한대수씨를 보았는데 청바지에 장발, 인상이 깊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한대수였고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의 노래 <행복의 나라>를 불렀어요"라고 회상했다.
당시에는 흔히 보기 힘든 청바지와 장발. 미국에서 갓 귀국한 히피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음반인 [고무신]을 내면서는 인도풍의 사이키델릭 연주곡인 <여치의 죽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곡 <나그네 길>등의 실험적인 곡들과 여전히 자유분방한 개인의 내면세계를 담았고(히피라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 개인주의자들 아닌가?) 리사이틀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에 들어갔으나 박지만씨의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모든 활동을 접어야 했고 미국으로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나갔고 이후 한국의 청년문화는 고사당하고 말았다.
이후 미국에서 그는 락 밴드 징기스 칸을 조직해 어느 정도 활동을 하다 중단을 하고 전업 사진작가와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노래말에도 드러나듯이 시인으로서도 그의 역량은 대단해 미국 비평가협회에서 주는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80년대 잠시 귀국해서 당시 신인들인 기타 손무현, 베이스 김영진, 드럼 김민기를 발굴하여 밴드를 조직하고 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재직했던 송홍섭의 편곡지원 등을 받아 80년대 한국 락음반중 가장 두드러지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락음반 [무한대]를 내었으나 영어로 가사를 적었다는 이유와 여전히 퇴폐적이란 딱지를 받고 제대로 일반에 보급되지를 못 하였다.
미국에 있으면서는 공식 음반활동으로는 퓨전 음악을 하는 기타리스트 잭 리와 재즈 피아니스트 이우창과는 [기억상실] 음반을 내면서 재즈에 도전하였고, 피아니스트 이우창과는 거실에서 녹음한 로우파이 음악/언플러그 음반인 [천사들의 담화]를 내었다.
우리에게 왕년의 포크가수로 잊혀져 가던 그가 일본에서는 70년대 일본의 청년문화의 상징인 카르멘 마키와 공연을 한다는 이유로 보도가 되기 시작했고 유니텔 락 콘서트에 초청을 받아 한국에 오면서 조금씩 다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올해 양희은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하면서 언론들은 그를 한국 포크음악의 개척자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그를 왕년의 포크 가수로 화석화시키기도 했다. 그는 언론들이 보도한 것처럼 왕년의 포크 가수가 아니다.
그는 알려진 포크 음반 [멀고 먼 길], [고무신] 2장 이외에는 포크가 아닌 쟝르를 한 아티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