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Alexander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Clara Haskil (piano)
Willem van Otterloo (Conductor)
Philharmonisches Orchester Den Haag

1951/05 Mono
Grote Zaal, Concertgebouw, Amsterdam

Robert Alexander Schumann(1810-1856)

작센의 츠비카우 출생.
아버지는 저술도 하는 서적상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과 음악적 감성이 깊은 사람으로 슈만은 아버지의 문학적 취미와 어머니의 섬세한 감수성을 이어받았다.

11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버리고 1828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 당시의 명교사 F.비크를 알게 되어 그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또한 슈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풍기는 가곡과 피아노곡 등의 작곡도 시작하였다. 1829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티보 교수에게 이끌려 잠시 그곳으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그는 다시 비크에게 피아노를, 극장 지휘자인 도른에게 음악이론을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 연구도 하였다.

또 1831년경부터는 참신한 필치로 음악평론도 쓰기 시작하여 쇼팽 등의 새로운 음악가를 소개하였다.
1832년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다치자 피아니스트가 될 꿈을 단념하고, 이때부터 작곡과 평론만을 지향하여 《나비》(작품 2, 1832)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의한 연습곡》(작품 3, 1832) 등의 피아노곡을 작곡하였으며, 34년에는 《사육제 Carnaval》(작품 9, 1835)와 《교향연습곡》(작품 13, 1834) 등을 내놓았다.
또 J.크노르, L.슝케, 비크 등과 함께 잡지 《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ur Musik》를 발행하여 낭만주의의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음악적 주장은 주로 이 잡지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1844년 드레스덴으로 떠날 때까지 많은 평론을 실었다.
1836년 어머니를 잃고, 스승 비크의 딸 클라라에 대한 친밀감은 더욱 강렬해져 연애에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클라라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슈만은 이를 법정에 제소하여 1840년에 결국 결혼에 성공하였다.

그때까지 거의 피아노곡만 써 왔던 그는 이 해에 갑자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의 생애를 통하여 작곡한 가곡의 반수를 이 1년 동안에 내놓았다. 하이네의 시에 의한 《가곡집》(작품 24)과 《미르테의 꽃》(작품 25),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의한 《가곡집 Liederkreis》(작품 39), 이 밖에 《여자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leben》(작품 42) 《시인의 사랑 Dichter Liebe》(작품 48)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교향곡에 전념하여 제1번과 제4번의 2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다시 1842년에는 실내악으로 전향하여 3곡의 현악4중주곡 ·피아노4중주곡(작품 47), 피아노5중주곡(작품 44) 등의 고전적 폴리포니(polyphony:다성음악)와 낭만적인 서정이 곁든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843년 L.F.멘델스존의 초청을 받아 신설 음악원의 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4개월에 걸친 아내의 러시아 연주여행에 동행하여 정신과 육체적 건강의 악화로 전지 요양을 권유받았다.
1844년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에서 ‘리더 타펠’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50년에는 힐러의 후임으로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라인교향곡》으로 알려진 제3교향곡, 첼로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쓰여졌다. 평론으로는 마지막 것이 되지만, 1853년에 젊은 브람스를 소개한 《젊은 길》이 슈만의 명성을 남긴 논문이다. 그의 정신장애의 징후는 이미 1833년경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844년경부터는 창작력이 왕성한 시기와 우울증에 빠진 시기가 서로 교차되어 나타났으며, 1854년 2월 심한 망상에 사로잡혀 라인강에 투신했으나 다행히 구조되어 그 후부터 본 교외의 엔데니히정신병원에 수용되고, 1856년 여름 2년간의 투병 끝에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작품은 고전파 작곡가처럼 모든 분야에 걸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뛰어나고 작품수가 많은 것은 피아노독주곡과 가곡이다. 이 가운데 3곡의 피아노소나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적 서정성이 담긴 낭만주의 향기가 풍기는 표제적(標題的)인 음악이다.
특히 가곡은 슈베르트가 개척한 리트형식을 계승하고 거기에다 시와 음악을 밀착시켜 보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주요작품 중 오페라에는 《Genovena》(1848), 교향곡으로는 《제1, 봄의 교향곡 Fruhlingssymphonie》(1841) 《제3, 라인교향곡 Rheinishe Symphonie》(1850), 피아노곡으로는 《피아노협주곡》(1845) 《사육제》(1835) 《환상소곡집 Fantasiestucke》(1837) 《교향적 연습곡 Etudes symphonique》(1834, 개작 1852) 《어린이의 정경 Kinderszenen》(1838), 관현악이 딸린 대합창곡으로 《Paradies und die Peri》(1843), 가곡으로는 《유랑의 무리 Zigeunerleben》(1840) 《Myrthen》(1840) 등이 있으며, 주요저서로는 《음악평론집 Gesammelte Schriften uber Musik und Musiker》(4권, 1854)과 서한집 《R.Schumanns Jugendbriefe》(1885) 등이 있다.
글 출처 : 클래식 코리아
R.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 54

슈만은 피아노 독주곡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있으나, 피아노 협주곡은 이 곡뿐인데, 이 협주곡의 특징은 제1악장의 제1주제가 제2, 제3악장에도 변형되어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며, 또한 피아노만을 중요하게 다룬 것이 아니라 관현악과의 일체성 속에서 피아노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도록 한 작품으로 낭만적인 향기가 감도는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히는 곡입니다.

1841년 여름에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을 완성하였으나 4년 후에 이것을 제1악장으로 해서 제2, 제3악장을 써서 1845년에 협주곡으로 완성하여 1846년 1월 1일에 라이프찌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되었습니다.

제1악장 Allegro affetuoso, a단조, 4/4박자, 소나타 형식

관현악과 피아노의 강렬하고 정열적이며 리드미컬한 짧은 서주에 이어 목관이 부드럽고 낭만적인 제1주제를 연주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간 뒤, 제2주제에 해당되는 선율이 나타나는데 제1주제와의 음형의 차이가 분명치 않아 이 악장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칸타빌레풍의 제2주제는 없는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개부는 슈만적인 따뜻한 서정이 넘치며, 재현부는 대체적으로 제시부와 같이 진행하고 화려하고 기교적인 카덴짜를 거쳐 코다로 들어가 주제를 확대시키며 피아노의 아르페지오의 상승으로 힘차고 화려하게 이 악장을 끝 맺습니다.

제2악장 Intermezzo : Andante gragioso, F장조, 2/4박자. 3부 형식

평온하고 따뜻한 전원 풍경을 생각나게 하는 악장으로 피아노와 현의 조용한 응답으로 주제가 펼쳐지며, 중간부는 C장조로 첼로에 의해 풍부한 표정의 낭만적인 선율로 시작되고, F장조로 돌아 오면서 제3부로 들어선 다음, 템포가 점점 느려지면서 제1악장의 제1주제를 클라리넷과 바순으로 장조와 단조로 두번 상기시킨 후 쉼표 없이 3악장으로 들어갑니다.

제3악장 Allegro vivace, A장조, 3/4박자, 소나타 형식.

피아노가 제1악장의 제1주제를 화려하게 연주하고, 제3악장의 주제를 암시하는 짧은 서주에 이어 피아노가 제1악장의 그것과 관련이 있는 제1주제를 밝고 당당하게 연주한 후 자유로운 경과부를 거쳐 E장조의 제2주제가 나타나고 이것이 전개되고, 이어서 코데타가 되어 제시부를 마칩니다.
전개부는 관현악에 의한 제1주제로 시작이 되는데 이 주제를 관현악과 피아노가 거칠게 다루면서 제2바이올린으로 시작되는 푸가토로 옮겨지고 오보에가 F장조로 새로운 선율을 연주한 후, 이것을 각 악기가 전조해 가며 진행하고 제1주제가 D장조로 관현악에 의해 힘차게 재현부로 들어 갑니다.

재현부는 제시부가 같이 진행되고 이어서 코다로 들어가는데 270마디에 걸친 이 종결부는 관현악의 투티로 시작하여 전개부처럼 발전되면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면서 화려하게 전곡이 끝나게 됩니다.
글 출처 : Go! Classic
하스킬 [Haskil, Clara, 1895.1.7 ~ 1960.12.7] 슬픈 전설로 남은 피아노의 성녀

고통과 싸워 이긴,아니 평생 고통과 함께 살아간 예술가들의 작품은 눈물겹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고통의 소산을 너무 쉽게 받아먹는지도 모른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는 클라라 하스킬, 이제 전설, 아니 여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하스킬도 그렇다.
그녀는 1895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알프레드 코르토에게 배웠으니, 같은 루마니아 출신 천재 디누 리파티의 동문 선배가 된다. 실제로 디누를 무척 아꼈으며, 디누가 백혈병으로 고통받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엄청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남 걱정할 처지가 못되었으니,

그녀 자신도 "평생토록 병마에 시달렸다.".
한창 젊은 18살, 여자 모차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음악계를 평정할 준비를 하고 있던 하스킬은 세포경화증이란 불치병에 걸린다.

이 병으로 온 몸의 신경이 모두 마비되고 말았는데, 무려 7년 간의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그럭저럭 활동을 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간신히 일어난 하스킬은 등과 허리가 모두 굽어 꼽추가 되었고 아름다웠던 미모도 모두 잃었다.

그 와중에 부모님은 일찍 죽었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친 세월이 무려 7년이었다.
그 불치병은 치료가 된게 아니라서 평생 그녀의 뼈와 근육을 괴롭혔으며, 그 외에도 온갖 잡병으로 늘 고통을 달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사진에는 웃는 모습이나 밝은 모습이 없다.

그렇게 평생을 고통속에 싸우면서도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동료의 고통을 먼저 애닮아 하며, 항상 수줍고 겸손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부모를 일찍 잃어버리고, 세계대전 뒤에는 완전 외톨이가 되었으며(남은 가족은 고양이 한 마리였다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아끼고 가족처럼 사랑했던 디누 리파티마저 먼저 저세상에 보내야 했던....

젊어서는 천재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의 정신적 지주이자, 플라토닉 연인이었으며(거의 엄마 같은 존재), 나이 들어서는 역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튀르 그뤼미오의 환상적인 파트너였다.
그렇게 하스킬은 고통속에서 꽃피었기에 더욱 신성한 위대한 연주를 들려주다가 65세에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65년이나 살았던 것이다.

하스킬에 대한 평가는 이 한마디면 족할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전설이요,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을것이라 칭송한 천재 디누 리파티가 말했다."여러분, 하스킬에 비하면 내 연주는 하찮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하스킬은 음반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전성기를 거의 다 지난 50대에야 이미 자신을 엄습하고 있던 죽음과 싸우며 녹음을 했다.
그나마도 피아노 독주보다는 총애하던 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를 위한 녹음이 많았다.글 출처 : 슈만의 음악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