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lo Concerto in a minor Op.129
작품 개설 및 배경 이 협주곡은 철저한 낭만주의자인 슈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명곡이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완성한 이 첼로협주곡은 어둡고 짙은 낭만적 정서가 그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슈만은 낭만주의 작가인 <장 파울>에게 깊이 심취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세 때 한 친구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장 파울을 읽었다면 우리는 보다 좋아졌겠지만 동시에 훨씬 더 불행해 졌을지도 모른다. 장 파울은 때때로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만, 그러나 평화의 무지개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힘이 달콤한 눈물을 머금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는 시련이 놀라울 정도로 순화되어 평탄해 짐을 깨닫는다"고...... 피아노 협주곡이 완성된지 5년후인 1850년(40세)에 빠른 속도로 완성되었다. '나는 거장을 위해 협주곡을 작곡하지는 않는다'고 확언했던 슈만은 어떤 협주곡도 그저 편안하고 즐겁거나 또는 어떤 독주자의 기교 과시를 위해 작곡하지 않았다. 이 첼로 협주곡도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비록 주종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결코 첼로만 혼자 뛰어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케스트라에 자연스럽게 융합시키면서 그지없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이다. 여기에 바로 이 협주곡의 특징과 연주상의 어려움이 있다. 작품의 구성과 특징 슈만은 만년에 주로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첼로 협주곡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뒤이어 작곡된 것이다. 그의 협주곡은 외형적인 면에서 기교에 치우쳐 있지 않고, 독주부와 관현악이 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시적(詩的) 분위기를 조성시켜 준다. 이 작품에서는 관현악을 극히 간소화시키고 첼로의 독주부가 균형을 취하여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고전적인 협주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독주부와 관현악부가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독주부가 오케스트라의 한 악기의 역할을 한다. 슈만은 첼로라는 악기를 충분히 고려하여 그 가치를 잘 나타내도록 했다. 이 협주곡은 높은 예술성이 풍기는 작품으로 낭만적인 첼로 협주곡으로는 으뜸가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1850년에 완성되어 그가 작곡한 지 10년 후인 1860년 6워 9일에 초연되었다. 이 곡은 저체가 3악장으로 되었으나 중단하지 않고 계속 연주되는 단일 악장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1악장 너무 빠르지 않게 가단조 4/4박자 소나타 형식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도입부를 지나 독주 첼로가 숨이 긴 제1테마를 연주한다. 얼마 후 C장조의 제2주제가 첼로 독주로 연주된다. 이 같은 형식으로 여러 갈래의 발전부와 재현부를 거쳐 제2악장으로 넘어간다. 제2악장 느긋하게 F장조 4/4박자 자유로운 2부 라이트형식. 대단히 짧은 악장이다. 로맨틱한 멜로디의 성격인데, 시종 첼로 독주로 연주된다. 제3악장 매우 발랄하게 a단조 2/4박자 자유로운 소나타형식. 처음부터 제1주제가 오케스트라와 독주 첼로의 대화 형식으로 제시된다. 얼마 후 제2주제가 나타나는데, 코다에 이르러 기교적인 카덴짜가 독주로 나타난다. 발전부, 재현부, 코다를 거쳐 힘찬 오케스트라와 함께 첼로는 A장조의 화음에 의한 빠른 프레이즈로 밝게 끝난다. 글 출처 : 클래식 명곡 대사전 중에서....
연주자 : Pierre Fournier, 1906.6.24~1986.1
"음악을 그 위대함 속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위대함을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낙담해 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해 주는 것이다. 음악의 매력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만들고 국경이 없는 왕국을 만들기 위해음악에 대한 사랑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음악교’의 교주 같은 설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을 남긴 푸르니에의 음악인생은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9세라는 어린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고, 이후 장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크게 상심했으나 주변의 많은 도움과 자신의 노력, 그리고 음악의 힘으로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따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뇌하는 면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가 프랑스인이란 것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푸르니에는 처음에는 피아노를 하려 했다. 하지만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항상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으나 불편한 다리로는 보통사람보다 몇 백배나 더 힘들었다. 다만 그의 성품과 악기의 성격은 잘 맞았다. 12세에 어렵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폴 바젤레르(Paul Bazelaire)와 안톤 헤킹(Anton Hekking)에게 첼로를 배웠으며, 1924년 18세의 나이로 독주자로 데뷔했다. 그는 26세이던 1932년, 늦은 나이에 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이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국외 연주여행길에 자주 올랐다. 프랑스 정부는 그 공로로 그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나이에 비해 기교가 뛰어났으며 놀라운 활의 재간으로 유명했다. 서정적인 연주와 뛰어난 예술감각으로 '귀족적 첼로 연주자'로 일컬어졌는데, 모리스 마레샬(Maurice Marechal)은 그를 '미래의 첼로 연주자'라고 평했다. 1925년 파리에서 에두아르콜론 관현악단과 협연하여 성공을 거둔 이후 유럽 전역을 돌며 알프레 코르토(Alfred Cortot), 자크 티보(Jacques Thibaud),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라파엘 쿠벨리크(Rafael Kubelik) 등 당대의 모든 유명 음악가들과 협연했다. 또한 아르투르 슈나벨(Artur Schnabel), 요제프 시게티(Joseph Szigeti), 윌리엄 프림로즈(William Primrose) 등과 함께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거의 모든 실내악곡을 fp코딩하기도 했다. 1937년, 코르토, 티보, 카잘스가 창립한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첼로와 실내악 교편을 잡았고, 41년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전쟁 통임에도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가 음악으로 전파하는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는 교육활동을 잠시 멈추고 연주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고 슈나벨, 켐프, 박하우스, 루빈슈타인, 굴다 등과 함께 연주하며 ‘평화와 사랑’을 전파했다. 56년 제네바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피에르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 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인 장 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1948년 처음으로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가졌고, 뉴욕과 보스턴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차츰 연주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파리음악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1959년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널리 알려진 첼로협주곡들을 연주했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왕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 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 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이런 모든 바탕 위에 인간애가 더해져 격조 높은 기품이 느껴지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고전음악뿐 아니라 현대음악도 좋아했던 그를 위하여 보후슬라프 마르티누(Bohuslav Martinu), 장 마르티농(Jean Martinon), 프랑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 등 여러 현대 작곡가들이 작품을 썼다. 1956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프랑스 국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피아노 연주자인 아들과 함께 가끔씩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소나타를 협연했다. 1963년 레지옹도뇌르 슈발리에, 이듬해 오피시에로 서훈되었다. 78세 때 런던의 퀸엘리자베스홀에서 독주회를 가질 정도로 노후에도 연주활동을 계속하다가 1986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 로열 노던음악대학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국제첼로페스티벌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글 출처 : 클래식 명곡 대사전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