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타령



  흥타령, 그 울음의 미학   

흥타령을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절로 흘러내린다.
참으려 해도 눈에서 눈물이 어쩔 수 없이 솟는다. 거 참 이상한 노릇이다. 음악을 들으며 감동이 벅차서 흐르는 그런 눈물이 아니다. 그냥 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못난 바보처럼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지도 못하고 눈물샘에 고여 있던 물들이 넘쳐흐른다.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하면서 이어지는 가락. 정말 아이고 대고 성화가 난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흐른다.

흥타령은 언제 어디서나 들어도 좋지만 어둠이 찾아드는 저녁, 그것도 한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세모에 들으면 더 제격이다.
언제인가 한 해가 저무는 깊은 저녁, 나는 흥타령을 들으며 짧은 산문 하나를 지은 적이 있다. 시를 짓기에는 전혀 감정이 절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흐트러진 언어로 이루어진 산문이다. 바로 흥타령이라는 음악이 그러하지 않은가.

눈물이 나는 세모에

"눈물이 납니다. 감기 탓만은 아닙니다. 하루 내내 눈물이 흐릅니다.
일요일 부모님을 교회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 기우뚱거리는 뒷모습에도 눈이 아픕니다.
어제는 찌푸린 하늘이 눈물 섞인 진눈깨비를 흩날리더니 오늘은 밝은 해가 온 누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납니다. 어루만지는 햇살이 고마워서 그런가 봅니다.

햇볕이 따스한 거실에서 티브이는 한해를 마감하듯 불쌍한 사람들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경알 안으로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감기 콧물과 눈물의 재채기는 나를 쿨럭거리게 하고 아들녀석이 아빠 울어 하는 소리에도 괜스레 눈물이 납니다.
어둠이 뒤덮은 저녁 문틈으로 찬바람이 스산하고 문득 멀리 있는 가족들 생각에 또 눈물이 납니다.
눈물을 이기려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동네가 떠나갈 듯 크게 틉니다. 4악장 환희의 송가도 듣기 전에 느린 아다지오에서 나는 그냥 또 눈물이 납니다. 긍정도 환희도 없이 지레 눈물이 흐릅니다. 눈물이 나니 차라리 챠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들으렵니다. 마지막 아다지오는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깊어갑니다. 아닙니다. 심청이 낳고 죽어 가는 곽부인 소리랑 그리고 대금과 아쟁에 흥타령을 들으렵니다. 끙끙 깽깽거리는 아쟁이 눈물을 다시 부릅니다.

'아이고 대고
나도 모르게 눈물만 흐르네
아이고 대고 어쩔거나 흥 성화가 났네, 헤'

소리는 밤을 저어가고 세월도 저무는 지금 풀벌레도 사라지고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 깊은 잠을 자는데 나는 그냥 숨을 쉬며 눈물이 납니다. 아마 올해 못 다한 눈물을 마저 흘리고 내년에는 울지 않으려 눈물샘을 말리나 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가슴속의 눈물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조그만 공간에서 훌쩍거립니다. 안경에 김이 서립니다. 수건을 꺼내 닦으려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울려 합니다. 그냥 눈물이 납니다."

당신이 그냥 울적하고 심사를 달래기 어렵다면 흥타령을 들어 보라.
얼마나 구성지고 처량한지 당신을 대신해서 펑펑 울어줄 것이다. 당신은 점잖은 사람이니 울고있는 곡을 들으면서 그저 눈물만 핑 돌아도 된다.
여하튼 가락을 한참 듣고 나면 속이 시원스레 깨끗해짐을 느낄 수가 있다.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지니 말이다.

사람이 웃음을 한바탕 웃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듯 역시 울음도 터뜨리고 나면 마음에 맺힌 무엇인가 멀리 사라지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랬는데 역시 웃음과 눈물은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 마음이라는 연못의 양끝 가장자리에서 모른 척 하던 서로 다른 두 얼굴이 손을 내밀며 합쳐진다.

곡을 틀면 보통 줄풍류의 반주가 먼저 모습을 보인다.
민요 가락이니 격식을 차려 여러 악기로 구성된 반주를 꼭 곁들일 이유는 없다. 하지만 조선 가곡에서 보듯이 악기편성을 제대로 하고 반주를 하면 노래의 흥이 더 솟는다.
예전미디어에서 출간한 국악제10집에 실린 흥타령은 원장현의 가야금, 김무길의 거문고, 박종선의 아쟁, 서용석의 대금 그리고 장덕화의 장고로 반주가 이루어진다.
연주자들의 면면이 모두 당대에 손가락 꼽히는 명인들이다. 원래 줄풍류는 피리도 있고 해금도 있으며 북도 있다. 여기서는 악기편성이 조금 다르지만 가야금과 거문고가 있으니 넓은 의미로 줄풍류의 맛이 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해금이 빠졌다는 사실이다. 대신 아쟁이 들어가 있다. 슬프고 처량한 노래이니 아쟁 반주도 잘 어울릴 수 있겠지만 그래도 민속악이라면 깡깽이가 걸맞을 터. 깡깽이라고 부르는 해금이야말로 흥타령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로 판단된다.

곡은 전형적인 남도 가락이다.
계면조 가락이니 대체로 슬픔이 깃들어 있는 노래임이 틀림없다.
시나위가 그렇고 시나위 가락을 바탕으로 발전된 산조가 그렇다. 판소리도 마찬가지이고 남도에서 불리는 많은 민요들이 모두 남도 토리의 특성답게 계면조로 되어 있다. 흥타령은 이러한 남도 가락 중의 하나다.

남도 민요라고 하면 육자배기, 잦은 육자배기, 보렴, 혼맞이 노래, 진도아리랑, 강강술래, 개구리타령 등 어지간히 많은 곡들이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육자배기이다.
서정주의 그 유명한 시 '禪雲寺 洞口' 때문일까.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육자배기는 호남지방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곡이다.
산조나 판소리에 비해 형식도 간단하고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좋다. 산조는 잘 다듬어지고 복잡한 가락이지만 육자배기는 민요가 풍기는 단순한 맛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흥타령과 비교하면 육자배기는 더 정교하고 섬세하게 불려진다.

느낌이 그렇다. 약간의 절제미까지 엿보인다. 소리가 구성지고 애처롭지만 그래도 눈물이 절로 흐를 정도는 아니다. 눈물이 그냥 철철 흐르는 소리라면 역시 흥타령이다.

흥타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제목의 모순에 주목한다.
흥이 나는 타령인데도 노래를 부르는 이는 왜 목이 절절이 메이는가. 그리고 듣는 이는 왜 눈물을 흘리게 되는가. 현대인이 운위하는 興이란 과연 무슨 의미인가.
보통 우리는 '흥이 난다'고 이야기하는데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흥이 일어난다는 뜻이고 나아가서는 신명이 난다는 말과도 의미가 상통한다. 즐겁고 신이 난다는 뜻일 게다. 국어사전을 보아도 흥은 '마음이 즐겁고 좋아서 일어나는 정서'라고 풀이한다.

하지만 흥의 의미가 꼭 즐겁다는 의미에 국한되어 있을까. 흥의 어원을 보면 그 유래가 대단히 오래고 의미는 복잡하다.
이미 詩經에 흥이 있는데 이는 '毛詩序'에 나오는 六義 중의 하나다. 여기서 나오는 賦, 比, 興은 시의 쓰임새를 뜻한다. 孔子의 論語에도 여러 차례 흥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예를 들어 '泰伯'에는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보이며 또한 '陽貨'편에서도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이라는 말이 보인다. 후인들은 이 구절들에 나오는 흥의 의미를 '起' 또는 '引譬連類' 등으로 해석한다.

魏晉시대 유협은 '起情曰興'이라 했으니 사람에게서 어떤 정감을 일으키는 것이 흥이라고 보았고 唐나라의 賈島 또한 '興子 情也. 謂外感於物, 內動於情, 情不可渴, 故曰興'이라 하였다. 이는 '樂記'에서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고 사람의 마음은 외부의 사물에 감응한다라는 유명한 명제에 다름 아니다. 宋대에 이르러 嚴羽는 흥을 강조하는데 그는 '滄浪詩話'의 첫 편 '詩辨'에서 시는 다섯 가지 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興趣라 했다. 理趣와는 대립되는 개념이고 意趣와도 다르다. 명나라 '陶明濬'은 이를 해석하여 '興趣如人之精神 必須活潑'이라 했으니 흥취란 사람의 정신과도 같아서 반드시 생명의 활발함이 있다라고 했다.

20세기 들어 중국에서는 갑골문자가 발견되어 그에 대한 연구가 청동기에 새겨진 金文의 해석과 병행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동안 여러 사람들의 연구를 통하여 고대에서 흥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밝혀졌다. 현재 중국북경대학의 젊은 미학교수인 '彭鋒'의 새로 나온 책 '詩可以興'을 보면 재미있는 분석이 나온다. '興'은 상고시대에 일종의 제사형식에 나온 말이다.
당시 제사를 지낼 때 커다란 祭器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네 사람이 맞잡고 들어올리는 것(上擧)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흥이라는 글자다. 또한 이 그릇을 들고 놀이를 하며(盤遊), 서로 노래를 하거나(呼聲) 음악을 다스리는데(節奏) 바로 이런 의미들이 함축된 것이 흥이라는 것이다. 절주란 무엇인가. 음악을 진행하면서 나오는 화성과 리듬을 맞추는 것이고 바로 이런 작용을 통해 사람들은 강렬한 심적충동을 느끼게 된다.

앞에서 언급된 흥의 여러 가지 의미를 종합하여 새롭게 해석을 한다면 흥이란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이며 또한 생명의 생생한 충동이라 말할 수 있다. 생명에 바탕을 두고 생명을 갈구하는 심정상태 또는 충동이 바로 흥인 것이다. 어느 인생이든 삶은 바로 생명이며 이를 지탱해주는 것은 강한 생명에의 충동이다. 원시시대부터 이런 있는 그대로의 생명의 움직임은 인류의 역사가 깊어졌다 해도 변동이 있을 수 없고 바로 우리가 듣고 있는 흥타령의 심정상태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문화가 진전되면서 여러 가지 문화의 양식과 규범 그리고 구체적으로 예술에 있어서 어떤 절제된 형식이 부단히 요구되어 왔다. 흥타령의 겨우도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하였겠지만 우리가 새삼스레 주목하는 것은 민속음악은 뭇 백성들의 정서가 녹아들어 있어서 이러한 통제가 많이 약화되어 본디 인간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잘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음악의 고상한 품위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로 속된 음률이지는 몰라도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런 인간심성을 숨김이나 꾸밈이 없이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흥타령은 민속음악이다.
음악의 승화된 형식이나 심미경계를 논하기에는 걸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흥타령에서 절제보다는 흐트러짐, 속박보다는 자유를, 세련됨보다는 거친 풀꾸러미를, 닫혀 있음보다는 열려 있음을, 꾸밈보다는 자연스러움,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고, 쌓아 담아두기보다는 탁 털어놓고 떨어버리며, 예의를 지키기보다 그냥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읽는다. 옷을 거추장스럽게 입으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만 그냥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있는 모습도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추하다고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겠지만 우리네 심성이야 본디 벗어 던져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더 눈길이 끌리고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가. 흥타령이야말로 삶의 생생한 충동을 있는 음악이라는 형식으로 있는 그대로 쏟아낸 것이다. 눈물과 울음이야말로 생의 가장 기본적인 충동이 아닌가. 흥타령의 흥은 바로 인간의 생명충동을 의미하는 그런 글자다. 아무런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도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들으며 느끼는 대로 마음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흥타령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그 연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부 가사 중에 '맹렬아, 맹렬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송흥록宋興錄(1801 - 1863)이 평양에서 사귄 기생을 못 잊어 불렀던 노래에 연유한다고 한다. 순조 때 사람으로 남원 운봉 출신이다.

판소리의 대가이며 동편제를 마무리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이를 근거로 하면 흥타령의 역사는 이백 년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산조나 판소리가 모두 18세기의 영정조 때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가락의 역사는 이백 년이 넘을 수도 있다.

가사를 읽어본다. 1984년 뿌리깊은나무에 출간한 음반의 가사다. 성창숙과 오정숙이 불렀고 장덕화의 장고, 서용석의 대금, 김일구의 아쟁이 반주를 맡았다. 앞서 언급한 국악제10집의 가사와는 다르다.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 이것저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것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랴는 꿈, 꿈을 꾸어서 무엇허리
이이고대고 어허 흥 성화가 났네, 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하는 삼경인듸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허여 잠 못 이루어 병이로다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 헤

한 '일'자 마음 '심'자로 혈서를 썼더니
일심은 어데 가고 이제 와 변했으니
가을 바람 단풍이 되었네 그려
아이고 대고 허허 난 성화가 났네, 헤

월명사창 요적헌데 옛 사랑이 그리워
벽상에 걸린 오동 앙인하여 내려놓고
봉곡 황곡을 시름 섞어 게서 타니
나도 모르게 눈물만 흐르네

아이고 대고 어쩔거나 흥 성화가 났네, 헤

가사의 내용이 허무와 그리움이다.
인생살이는 정말 꿈과 같은가. 한 세상 살기를 무엇 때문에 아둥바둥 서럽게 살 것인가. 그저 꿈인 것을. 그래도 기다리는 님은 있었던가. 그리움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가사 내용이 서글프기는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사보다 가락에서 비감이 한층 더 진하다는 점이다.

위에 인용한 가사를 음악 없이 가사만 읽는다면 그저 통상적인 글이요, 내용은 평범하기까지 하다. 눈물이 날 턱이 없다. 이를 보면 역시 음악은 그 순수한 감정 표현에 있어 문학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 틀림없다. 음악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흥타령의 선율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며 우리가 그 동안 참고 터뜨리지 않았던 눈물샘의 둑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무서운 힘이다.

눈물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눈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척추동물의 누선에서 나오는 분비액이라고 풀이한다. 하루의 분비량이 1.2ml 가량이고 잠을 자는 동안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3개월 이내의 신생아는 울음을 울더라도 눈물은 나오지 않으며 여성이 남성보다 눈물의 양이 더 많다고 한다. 사람이 슬픔을 느낄 때 눈물은 다량으로 흘러나오는데 현대과학으로도 그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신비스럽다.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기술을 통해 눈물을 어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삶에서 부딪치는 눈물이야 어찌 간단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눈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마음으로만 흘리는 가슴의 눈물이 있다. 그러나 눈물이 눈물다운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일 정도로 액체가 되어 흐르는 눈물이다. 이런 경우에도 눈물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의리파 사나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소리 없이 주루루 흘리는 눈물이다. 주먹이나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한다.
여인들이 등잔불 밑에서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도 있다. 어깨를 들썩거리지만 몰래 자세히 엿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가 없다. 규방의 눈물이다. ‘깨끗한 슬픔’이 흘리는 눈물도 있다. 유재영 시인의 시조에서 눈물은 꽃이 된다.

눈물도 아름다우면 눈물꽃이 되는가
깨끗한 슬픔 되어 다할 수만 있다면
오오랜 그대 별자리 가랑비로 젖고 싶다

새가 울고 바람 불고 꽃이 지는 일까지
그대 모습 다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가
깨끗한 슬픔 하나로 그대 긴 손 잡고 싶다

시조의 맑은 가락이 눈에 선하다.
부드러운 운율이 돋보인다. 누군가가 이런 가사에 노래를 붙인다면 그 가락을 듣는 우리의 눈물은 맑게 걸러져 방울방울 꽃송이가 될 것이다. 눈물 하면 이백李白의 왕소군王昭君을 연상하기도 한다.
북쪽 오랑캐에게 시집을 가야만 하는 왕소군이 흘리는 눈물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본인이야 어떻든 문학에서 형상화시켜 부르는 눈물이다. 불그스레한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말없이 주루룩 흘러내리는 눈물이야 보는 사람의 구곡간장을 녹이고도 남는다.

또 서도소리의 처량한 눈물도 있다. 수심가 토리들은 아주 처량하다. 고생에 시달리다 못해 이제 울음도 다 말랐는지 그저 메마른 울음소리만 들린다. 북녘 하늘에서 매몰차게 부는 삭풍은 가슴을 더욱 냉랭하게 만들고 수심가를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느다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울음을 울게 한다.

그렇다면 흥타령이 흘리는 눈물은 어떤 것일까.
아마 나이는 적어도 40은 넘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남정네가 아니라 아낙네의 눈물일 것이다. 여자가 눈물이 더 많다고 하지 않은가. 아낙네도 좋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줌마라는 호칭도 좋다. 할멈일 수도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벌판에서 일하는 아줌마. 그리고 집안 살림에 언제나 바쁜 아낙일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은 그저 평범하다. 하지만 삶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가난에 시달리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시부모도 모시고 농사일도 거들어야 한다. 옛날에는 많은 남정네가 가정은 몰라라하며 바람이나 피우고 씨앗을 두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일은 안하고 술이나 받아 오라 하고 휑하니 며칠 씩 나가서 들어오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의 애를 태우기도 한다. 우리의 여인네들은 이런 삶을 숱하게 살아왔다. 그렇다고 어디 마음놓고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려운 삶이지만 억척스럽게 이겨낸다. 견디며 싸우는 것이다. 눈물이 많은 그들이지만 울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쇳덩어리가 아니다. 여리고 여린 마음이, 연못처럼 고여 있던 눈물샘이 때를 만나지 못했을 따름이다.
어느 날 그렇게 무심했던 남정네가 그나마 떠나 가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또는 자식이 뜻하지 않게 병들어서 아니면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전쟁터에 갔던 남정네나 자식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 들을 수도 있다. 한세상 살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버텼던 힘이 순간적으로 무너진다.

흥타령의 눈물은 바로 이렇게 나온다.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 닥쳐온다. 눈물은 마냥 쏟아진다. 그냥 눈가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이 아니다. 펑펑 흘러나온다. 목을 놓아 우는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체면도 따지지 않는다. 서서 울 수도 있지만 펑퍼짐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운다. 두 다리를 몰라라 편하게 뻗을 수도 있다.

나는 일전에 티부이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여인이 전쟁 중에 잃어버린 자식을 생각하며 나무 한 그루 없는 돌바위 언덕에 걸터앉아 주위에는 아랑곳없이 소리를 내며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흥타령의 눈물은 바로 이런 눈물이다. 대성방곡이라 할 수도 있고 울부짖는 울음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눈물의 양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터졌던 봇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흐르는 눈물이다.
송흥록이 불렀다는 흥타령의 가사를 보면 첫 마디가 ‘맹렬아’ 하고 누군가를 부른다. 아마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일 것이다. 흥타령의 첫 곡은 보통 낮고 조용한 소리로 시작하여 톤을 높여간다. 그러나 맹렬아가 나오는 마루에 이르면 시작부터 높게 내지르는 소리가 나온다. 서양음악과 달리 초반부터 강한 소리를 내지르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이는 우리 조선 가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가락의 특성이다.
그러나 흥타령에서 ‘맹렬아’ 하고 부르는 외침은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된다. 누구를 부를 때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어떤 한이 맺혀 있을 때 어디 한번의 부름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목이 메어지라고, 목이 터지라고 여러 번 불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외치는데도 답은 없다. 이미 떠나간 사람이니 답이 있을 리가 없다. 해서 “나를 두고 갈려거던 정마저 가져가라”에 이르러는 외침은 사라지며 비통한 가락이 우리를 아연케 한다. 계면조 가락의 비장미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반주하는 아쟁은 왜 그리 또 처량한지. 눈물이 아니 나올 수가 없다. 또 다른 가사를 보면 “슬피우는 저 두견아 --- 너마저 내 옆에 와서 구곡간장을 태우니 너도 울고 나도 울고 같이 울어 날 새우자”하며 노래를 한다. 노래가 아니라 울음의 잔치다. 내가 서러우니 만물이 서럽다.

흥타령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거칠고 굵고 그리고 쉰 목소리다.
판소리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음색이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소프라노처럼 곱고 맑은 소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흥타령에서 여인은 굵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한편으로 부르는 음들을 흔든다. 목이 떨린다. 우리 기악음악에서 보이는 요성이다. 일종의 농현효과이다. 목소리를 흔들며 부르니 감정은 미세한 점도 놓치지 않고 표현되며 그 감정이 슬픔이라면 슬픔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소프라노는 어떻게 보면 가성이다.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물론 우리의 창도 제대로 부르려면 목소리를 다듬으려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지만 소프라노의 경우와는 다르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위적인 면을 거의 느낄 수가 없다. 통상적인 사람의 목소리 그대로다. 인간의 어떤 원초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원형을 감지할 수가 있다. 가식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를 더 감동시킨다.

이런 아름다움은 우리의 특징이기도 하다.
창덕궁 후원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대표적이다. 그보다도 구례에 있는 화엄사의 기둥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대한 소나무 기둥인데도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구부러진 모양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들보도 그렇고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는 기둥도 굽어 있다. 심지어는 튀어나온 바윗돌을 깎지 않고 기둥을 세워, 같은 높이의 건물임에도 기둥의 길이가 일정치 않다. 또 있다.

조선시대의 막사발이 바로 좋은 예다. 이웃 일본에서는 조선 막사발을 국보로 취급하는데 이는 일리가 있다. 막사발은 일반 서민들이 흔히 사용하던 자기다. 상류 지배 계급들이 청자나 백자를 음미하며 즐기고 있을 때 서민들은 손쉽게 대량으로 구워 낼 수 있는 사발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사발들은 가식이 전혀 없다. 인간의 때묻지 않은 원형이 사발에 담겨 있다. 일본인들은 이를 간파하고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것이다.

흥타령이 눈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곡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슬픈 가락을 토해내고 있지만 제목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노래는 흥타령이다. 흥타령은 곡의 속도가 중모리이지만 같은 계면조라도 자진머리로 노래되는 가락은 흥겨운 면도 있다.
물론 흥타령은 자진머리로 불려지는 부분은 없다. 그래서 일까. 제목만이라도 그렇게 되라고 흥타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순의 미학이다. 이는 우리 전통예술에 흔히 나타나는 우리만의 멋이다. 처음 듣는이로 하여금 의아함을 느끼게 하지만 전혀 그럴 이유는 없다. 들어서 슬프면 그만이다. 그리고 실컷 울고 나서 마음이 후련할 때 다시 한번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고 한번 씽긋 웃으면 그만이다.

현대인들은 눈물이 없다.
각박한 인생살이들만 눈에 보인다. 명예와 부와 권력을 추구하며 언제나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트레스가 만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놀거리가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울음을 울 겨를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누가 우는 모습을 본지도 오래다. 장례식에 가더라도 상주나 조문객이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눈물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과연 그럴까. 눈물은 이제 필요 없을 만큼 인간은 진화한 것일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눈물도 말라버린 세상이 되었다. 더 냉혹하고 차갑다. 그래서 뜨거운 눈물이 그립다. 사람 냄새가 나는 눈물이 보고 싶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도 언제인가 울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울어보고 싶었으리라. 이럴 때 흥타령을 한 번 들어 보라. 흥타령의 가락에는 이미 눈물이 흥건히 배어 있어 당신이 곡을 틀자마자 흥타령은 스스로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듣는 당신의 메말랐던 눈물샘을 자극하여 소나기 내리듯이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다.
그렇다고 목을 놓아 울 필요는 없다. 당신의 가슴이 소나기 눈물로 촉촉이 젖어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짝 말라 있던 당신의 눈물샘은 샘솟듯 눈물을 쏟아낸다. 그렇게 하고도 남는 눈물은 나중에 또 울을 수 있도록 조그만 연못을 이룬다.
그리고 한번도 울어보지 못한 당신의 가슴에 비로소 풀도 나고 나무도 자란다. 그런 가슴이야말로 생명이 움틀 수 있는 땅이다. 그리고 당신은 편안해진다. 울음을 울고 나면 웬지 모르게 마음이 가볍고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우리가 흥타령을 듣고 사랑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흥타령은 민요로서 돌림노래이다. 한 사람이 부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이 각기의 마루를 번갈아 부르기도 한다. 보통 세 마루가 한 묶음이 되어 곡을 형성하고 있어서 첫째 둘째 마루는 시작을 낮은 소리로 시작하여 점차 긴장을 돋구어 가고 마지막 셋째 마루에서 첫머리를 높게 큰 소리로 시작한다. 긴장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맹렬아 하는 가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물론 흥타령을 요약하여 짧은 길이로 부를 때는 첫 마루부터 된소리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나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내가 갖고 있는 흥타령 음반은 모두 다섯 종류이다. 길이도 서로 다르고 놀랍게도 가사가 전부 다르다.
한 두 마루의 가사가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경우가 있지만 구체적인 단어는 또한 다르다. 오분 남짓한 것부터 최장 24분이 넘는 것도 있다. 이는 돌림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곡조를 되풀이하며 부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동양음악의 특징을 읽을 수가 있다.
조선가곡의 경우 한 곡에 무수한 사람들이 새로운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른다. 조용필‘돌아와요 부산항’이라는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 듣는 사람은 그 곡조에 따라 새로운 가사를 만들어 나름대로 노래를 부르며 즐기면 된다. 어찌 보면 예술작품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다. 대상으로서의 예술과 감상자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새로운 변형으로 합일을 이루어낸다.
이 글의 머리에서 내 스스로 짧은 산문을 하나 지었듯이 여러분도 흥타령을 읽으며 나름대로 가사를 만들어 구성지게 한번 읊어봄이 어떠신가. 끝으로 흥타령의 다른 가사를 읽어본다.

무정방초는
년년이 오는데
청춘은 한번 가면
다시 올줄 모르는고

꽃이 고와도
춘추단절이요
우리 인생이 청춘이라도
청춘 한 때뿐이로다

떳다 보아라 종달새는
천장 만장 구만장 떠
너울너울이 춤을 춘다

송죽같이 꿋꿋한 마음
풍류라 변치말고
쇠끝같이 굳은 절개는
화류에 논다고 변할손가

서산에 해는 지고
갈 길은 천리로다
부뜰고 우는 내 사랑
가는 나를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으려무나

글쓴이 : 황봉구
출  처 : 시사랑 문예대학(https://www.poemq.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