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Wilhelm Furtwangler(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1943/06/30 Mono
Philharmonie, Berlin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작품 개설 및 배경

고금의 교향곡을 통해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도 드물 것이다.

베토벤의 9개의 교향곡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교향곡도 이 곡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곡이 절묘하다.
처음의 ‘다다다단’하는 4개의 음은 ‘운명은 이같이 문을 두드린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곡을 듣는 순간부터 이 음악의 알 수 없는 힘에 압도된다,
그리고 전곡을 듣고 난 후에는 틀림없이 가슴의 뭉클함을 느낄 것이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새로운 감동을 느끼게 하는 음악의 하나이다.

‘베토벤’은 30대의 전반, 인간으로서나 작곡가로서 또한 음악가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청각을 잃었다.
그래서 한 때는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나 자기에게 부과된 예술상의 사명을 자각하고 굳세게 살 것을 결심했다. 그때의 생각을 자세하게 기술한 것이 32세이 1802년 가을, 두 명의 동생들에게 적은 흔히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고 불리어지는 편지이다.

그는 이 편지를 쓴 후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서나 한층 성숙해져 이전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걸작들을 잇따라 만들어 나갔다. 이 「교향곡 제5번」은 ‘나폴레옹’에게 바치려고 쓰여졌던 제3번 『영웅』에 이어서 작곡에 착수한 것으로 38세인 1808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자기의 청각 장애를 알아차렸을 때 어떤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운명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겠다.”고 적고 있는데, 이 곡에는 그와 같이 운명에 도전해 가려는 혈기 왕성할 무렵의 그의 적극적인 자세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의 불굴의 투지는 모든 고난과 공포와 비극을 극복하고서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 그의 이념을 이 작품은 나타내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곡은 『운명』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제자인 ‘쉰들러’가 제1악장의 전체 주제의 의미를 질문했을 때, ‘베토벤’이 “운명은 이와같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는 데서 유래하고 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다만 「제5번」이라든가 「단조 교향곡」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운명」을 듣고 있노라면 두꺼운 운명의 벽을 하나하나 뛰어넘어 가시밭길로 돌진해 가는 ‘베토벤’의 늠름한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고, 또 그와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 이 곡의 최대 매력이다.
이 곡은 1808년 12월 22일, 안데어 빈 극장에서 초연하였으나 그의 후원자였던 ‘로그코비츠’ 공작과 ‘라주모프스키’ 백작에게 헌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작품의 구성과 특징

흔히 "운명"이라는 부제로 알려진 베토벤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곡이다.
하지만 이 부제는 베토벤의 다른 교향곡들, 3번 '에로이카', 6번 '전원', 9번 '합창'과 같이 정식으로 작곡자가 붙인 이름은 아니다. 이 곡은 C단조로 쓰여졌기때문에 서양에선 주로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으로 불려지며 'Fate'라는 부제를 붙이는 것은 드물다.

이 곡은 너무 유명하고 보편적이어서 음악을 좀 들었다하는 사람들은 애써 이 곡을 언급하기를 피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몰라서도 안될 필수적인 곡이다.

이 교향곡에 대한 유명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함으로써 이곡이 당시 음악계에 던져준 충격을 추측해볼까한다.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회상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있다.

베를리오즈의 스승이면서 프랑스의 저명한 음악교수인 르쥐외르(Lesueur)는 학생들 사이에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베토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하루는 베를리오즈의 성화에 못이겨 C단조 교향곡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가게 되었는데, 연주가 끝난 뒤 베를리오즈는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그에게 달려갔다.
"어땠습니까, 선생님?"
"우선 바람을 좀 쏘여야겠어, 굉장하군. 모자를 쓰려고 했을 때 내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어. 지금은 아무 말도 할 게 없네. 다음에 얘기하세."

다음 날 베를리오즈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 때의 감동을 얘기하면서도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 음악은 더 이상 작곡되서는 안될꺼야."
베를리오즈가 대답하기를,
"물론입니다, 선생님. 다른 사람이 그런 음악을 작곡할 염려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 곡은 전형적인 교향곡처럼 모두 4악장으로 되어 있다.

제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c단조 2/4박자 소나타 형식
    클라리넷과 현의 유니즌이 ff로 『운명』의 동기를 두들기듯이 하여 곡을 연다. 이 단순한 동기가 연달아 겹쳐지고 순식간에 제1주제부가 구성된다. 호른이 이 동기의 변형을 결연히 연주한 뒤 바이올린이 p로 차분하게 애소하는 듯한 제2주제를 제시하고, 클라리넷과 플루트가 이것을 이어받으면서 또다시 어두운 구름이 감돌기 시작한다. 이상의 제시부는 반복되는 것이 보통이다.

호른의 드높은 취주로 전개부에 들어가게 되면 『운명』의 동기는 마음껏 구사되는데, 제2주제는 단편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재현부에 들어가면 제1주제부의 중간에서 오보에가 짧고 가련한 카덴차(cadenza)를 연주한다.
웅대한 코다는 전례 없이 궁리를 짠 것으로서, 제2의 전개부를 연상케 하고 곡상(曲想)이 또다시 고조된 뒤 단호하고 간결하게 끝난다.

제2악장 안단테 콘 모토 내림A장조 3/8박자.
    자유로운 3개의 변주곡으로서, 전투적인 악장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의 휴식과 명상이 조용히 전개된다. 우선 비올라와 첼로로 주제가 시작되고 다시 모든 현악, 목관군으로 승계되어 전개된다.
특별히 새로운 맛은 없지마 비장감이 넘쳐서 곡상을 압축해주고 있다.

제3악장 알레그로 c단조 3/4박자 스케르초.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신음하듯 주제를 제시하면 바이올린이 이것을 받는다. 이 악상이 반복된 뒤, 갑자기 호른이 『운명』의 동기를 강하게 연주하여 전투재개를 연상케 한다. 트리오는 엄숙하면서도 약간 익살스러운 것으로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크게 활약한다.

'베를리오즈'는 이 부분을 "코끼리가 기뻐서 춤을 추은 것 같다."라고 평했다. 스케르초의 재현은 악상이 대담하게 변화하고 pp에서 소용돌이를 치듯이 크레셴도(crescendo)하여 그대로 끝 악장으로 들어간다.

제4악장 알레그로 C장조 4/4박자
    장려한 소나타 형식의 피날레로 앞 악장에서의 기대와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면 투티의 ff로 웅대한 제1주제가 개가(凱歌)처럼 제시되고, 현란한 부차 주제를 거느리면서 왕자처럼 힘차게 행진한다.

이 흥분의 뒤를 승계하는 제2주제는 밝고 명랑한 것으로서 코데타에 이어진다. 이 제시부도 반복도는 것이 원칙이다.

전개부는 제2주제를 중심으로 제1주제와 부차 주제를 더한 화려한 악상으로서, 강렬한 클라이막스를 형성한다. 그러 다음 곡상은 일전하여 제3악장 스케르초의 마지막 부분이 회상되고, 또다시 기대와 긴장을 부추기면서 재현부로 옮겨진다.

파곳이 한가로운 선율을 도입하여 코다로 들어가고 이 선율이 전개된 뒤, 두 주제와 부차 주제가 정성스럽게 재현, 전개되면서 프레스토가 열광하는 가운데 곡이 끝난다.

글 출처 : 골든 클래식 100 앨범 Review 중에서....
연주자 : Wilhelm Furtwangle

빌헬름 푸르트벵글러(r,1886~1954)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전통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지휘자이다.
어느 날 푸르트벵글러가 토스카니니를 우연히 만나 나의 연주를 듣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토스카니니는 "나는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소리로 옮기고 있다"고 대꾸했고 푸르트벵글러는 "그렇다면 나는 악보 뒤에 숨어 있는 음표들을 찾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처럼 푸르트벵글러는 소리 뒤에 숨어 있는 정신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 젊은 빌헬름은 실링스의 천거로 뮌헨에서의 한 연주회에서 대리 지휘를 맡으면서 지휘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1906년 그는 뮌헨의 카임관현악단을 지휘하며 정식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는 1915년 29세의 나이로 만하임 오페라와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5년동안 활동하며 지휘자로서의 자기 주관을 확립해가기 시작한다. 1927년 그는 빈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됨으로써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들을 석권하며 바야흐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았던 여러 오케스트라의 상임 자리를 포기하고 베를린 필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의 이상을 가장 잘 반영해줄 오케스트라로 베를린 필을 선택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많은 유태계 독일인들은 추방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베를린 필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단원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탄압의 손길을 다소 늦추는 정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른 예술가들처럼 미국으로 망명했다면 평온한 생활속에 각광받는 마에스트로로서의 생애를 보낼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치 통치하의 독이보다 베토벤의 음악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며 자신의 동포들을 버리지 못했다.

1934년 푸르트벵글러는 파울 힌데미트의 신작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초연에서 나치의 반감을 샀다.
나치가 보기에 이 내용은 불온했고 선동적이었기 때문에 공연이 금지됐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적인 면에서의 결정권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으며 정치가 예술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공연을 강행했고 이 사건을 대중의 열렬한 호응 속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소식은 곧 히틀러에게 알려졌고 그는 특별지시를 내려 힌데미트의 오페라를 금지했다.
이에 푸르트벵글러는 모든 공직을 사임했지만 그의 사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망명할 수 없도록 출국을 금지 당했다.

결국 이듬해 4월 푸르트벵글러는 다시 독일에서 지휘를 하게 되지만 예전처럼 나치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은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나치 정권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관리했고 지휘할 음악과 장소를 모두 나치의 규제 하에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 1월22일 연주회 도중 연합국의 공습으로 연주는 중단됐고 그는 곧 빈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는 전범으로 몰렸으나 나치 집권시절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와준 유태인 음악가, 반체제 인사들의 구명운동 덕에 1947년 무죄판결을 받고 다시 연주해도 좋다는 연합군의 허가를 받았다.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은 두 장의 역사적 명반이 있다.
한 장은 1942년 3월의 베를린 실황 연주를 녹음한 것이고 다른 한 장은 바이로이트 축제 실황 연주를 녹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