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 No.1 in e minor Op.39
작품 개설 및 배경 시벨리우스가 교향곡 1번에 대한 구상을 시작한 것은 1898년 봄 베를린에서였다. 당시의 구상은 표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듬해인 1899년 봄에 1번 교향곡의 초판을 완성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1899년 2월 15일 러시아의 니콜라스2세는 '2월 선언'을 발표하면서 핀란드 대공국의 자치권을 박탈하게 된다. 핀란드의 모든 권력은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되고 의회는 단지 자문의 역할만을 맡게된 것이다. 따라서 핀란드의 곳곳에서는 저항의 움직임이 있었고 시벨리우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판은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1899년 4월 26일 콘서트에서 초연되었는데 같은 날 "아테네인들의 노래 (The Song of the Athenians)"라는 곡도 함께 연주되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그 곡은 러시아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핀란드인들의 염원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물론 1번 교향곡에 대한 평가도 좋았으나 정작 시벨리우스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00년 봄/여름의 유럽투어를 준비중이던, 지휘자이자 친구인 Robert Kajanus 를 위해 곡을 개정하게 되었고 초판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시벨리우스는 큰 아픔을 겪게 되는데 바로 세째딸 Kirsti가 돌을 몇달 지난 2월13일에 장티푸스로 사망하게된다. 그는 크게 낙심하게되고 그 영향이 1번 교향곡의 전반적인 우울한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개정된 1번 교향곡은 1900년 7월1일 헬싱키에서 카야누스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후 유럽 공연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각국의 평론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된다. 1번 교향곡은 이후의 교향곡들과는 달리 서정성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시벨리우스는 훗날 그 사실을 부인한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의 러시아와 핀란드를 관계를 봤을 때 그가 차이코프스키를 의식하고 곡을 썼을리는 없어 보인다. 다만 당시의 작곡기법이 브람스나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므로 그런 유사성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를 차이코프스키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편성 : 플루트2 오보에2 클라리넷2 파곳2 호른4 트럼펫3 트롬본3 튜바 팀파니 큰북 심벌즈 트라이앵글 하프 현5부 작품의 구성과 특징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북구의 서정이 물씬 풍기는 좋은 곡들이다.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의 정서와 다른 것은 뭐랄까 좀더 남성적인 맛이 나는 것 같다. 마치 하얀 눈이 덮인 세상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연기나는 굴뚝집을 보는 따스한 느낌에서 거대한 빙하를 보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 침엽수가 우거진 산을 보는 그런 느낌 들이다. 물론 심각한 얼굴을 한 젊은이의 얼굴을 보거나 눈을 지그시 감고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우수에 젖은 단아함과 깊은 사색의 분위기 때문에 좋다. 차이코프스키 5번이 시벨리우스의 1번과 2번보다 더 따사롭기는 하지만 우울하지 않게 분위기를 잡는데에는 시벨리우스가 한 수 위이다. 1907년 말러와 시벨리우스 사이에 오간 "교향곡은 무엇이고 또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얘기는 음악사에서 굉장히 유명하다. 그 때 시벨리우스는 당연히 말러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했고 바로 그 점이 고스란히 (덜 구조적이기는 하지만) 제 1 & 2번 교향곡에 녹아 들어 있어 특히 좋다. 1악장 Andante ma non troppo allergro energico 1악장은 Andante, ma non troppo의 서주로 시작하는데 이는 팀파니의 롤위에 클라리넷의 모놀로그로 구성되어있다. 이 모놀로그가 피날레 서두에 부풀려져 연주되는 기법은 마치 차이코프스키 5번 교향곡을 연상케도 하는데 그만큼 이 주제는 1악장과 피날레를 연결시키고 전곡에 조금이나마 통일성을 부여한다. Allegro energico의 호방한 제1주제는 G장조인지 e단조인지 다소 애매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언제 들어도 멋지다. 그리고 트럼펫으로 제1주제가 크게 부풀려지는 부분에는 금관도 제법 뜨겁게 불을 뿜기 때문에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다소 억제되어있고 느끼는 분에게는 전혀 새로운 느낌을 전달하리라 본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트레몰로 그리고 하프의 반주 음형위에 흐르는 목관의 스타카토성 경과구를 거쳐 Tranquillo의 애수띤 제2주제로 돌입한다. 제2주제군은 5도음의 긴 페달 포인트를 두고 있으며 전체가 하나의 크레셴도와 아첼레란도로 구성되어 있다. 발전부는 팡파레가 곁들여진 금관 섹션 이후 2대의 바이올린이 황홀한 솔로를 주고 받는 에피소드를 거친다. 이후는 모티브를 리듬적으로 잘라 베토벤 적인 시퀀스적인 전개를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말러나 브루크너가 시퀀스적인 전개를 포기하고 마치 새로 쓴 제시부처럼 전개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으며 시벨리우스의 Beethovenian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후 큰북이 가세하고 꾸불거리는 저현의 반음 스케일을 따라 감7화음적인 경과구를 거쳐 점차 제1주제의 분위기로 돌아온다. 제1주제가 영웅적으로 재현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제2주제도 원조성인 e단조로 재현된다. 코다는 매우 짧으며 금관의 코랄이 비극성을 증폭시키며 현의 피치카토 2번이 최후를 알린다. 이런 끝맺음은 피날레와도 링크되어있다. 제 2악장. Andante Andante (ma non troppo lento)의 2악장에서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과 첼로의 옥타빙으로 제시되는 1주제는 참으로 아름답다. 시벨리우스라기 보다는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에 더 가까운 감각이라 하겠는데 그래도 아주 싸구려로 흐르지 않으며 특유의 깊이가 있는 것이 놀랍다. 이러한 대중성이야 말로 시벨리우스 1번의 묘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 같은 선율을 바이올린의 D선의 하이포지션으로 (아주 달콤한 음색이다. 세헤라자데 3악장 도입을 생각하면 될 듯) 소토 보체로 반복하는 것은 시벨리우스의 탁월한 센스이다. 2악장의 형식은 론도 형식이 가미된 자유로운 형식이라 하겠는데 중간에 아주 드라마틱한 절정이 있고 특유의 조용한 멜랑콜리적 분위기는 처음과 끝에 투영되어있다. 달콤한 제1주제 (A)뒤 Un poco meno andante로 바순의 애수띤 선율 (B)이 삽입되고 솔로 첼로가 불안하게 제1주제를 짧게 삽입하고 (A') Molto tranquillo의 템포로 바그너의 ‘지크프리트’ 숲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혼의 목가 (C)가 삽입된다. 불안한 분위기이지만 제1주제가 크게 드높혀지고 (A'') Poco a poco stringendo로 음악은 휘몰아치며 (D) 급기야 심벌즈가 6번씩이나 강타하는 섹션을 지나 절정과 파국으로 인도된다. 최후에는 마치 에필로그처럼 처음과 완전히 동일한 분위기로 제1주제를 회상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제 3악장. 3악장 Scherzo allegro 스케르초의 3악장은 베토벤 9번 2악장이나 말러 7번 피날레처럼 팀파니가 마스코트라 할 수 있는데 팀파니가 주요주제를 자주 독주로 연주하기 때문이다. Allegro의 주요주제는 선율이라기 보다는 리듬적 요소가 강하고 일종의 리듬적 음세포라 할 수 있다. 혹자는 3악장을 거친 전원무곡이라고도 하는데 필자에게는 ‘약간 순화된 바르톡’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3악장은 강박과 약박이 뒤바뀐 부분과 헤미올라 (2박과 3박의 교차)가 많이 존재하여 듣기보다는 리듬 타기가 쉽지 않게 되어있다. 주부 후반부에는 푸가토도 삽입되어 약간 아카데미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Lento의 트리오에는 혼이 목가적인 선율을 연주하는데 일종의 숲의 정경을 연상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선율 구성이나 화음 구조를 쉔커식으로 분석하면 2악장의 주제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멜로디의 골격이나 화성구조는 피날레의 제2주제에도 같이 적용되어 일종의 순환양식처럼 느껴지게 된다. 후반부에 삽입된 하프의 매혹적인 글리산도는 마치 라벨이나 림스키코르사코프 같은 분위기를 전달한다. 4악장 Finale(quasi una Fantasia) Quasi una Fantasia(환상곡 풍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피날레는 교향곡의 결론으로서 논리적 설득력이 다소 부족한 듯하지만 그 아름다운 곡상은 일품이며 환상곡이란 부제가 잘 어울리는 것이다. 물론 서두에는 Andante의 템포로 앞서 말한 1악장의 클라리넷 모놀로그가 현으로 연주되는 장면이 있다. 템포는 Allegro molto로 바뀌고 리듬적인 모티브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제1주제가 제시된다. 마구 할퀴는 듯한 현의 경과구 이후 Andante assai의 제2주제가 바이올린으로 G선으로만 연주된다. 이 주제는 긴 호흡의 칸타빌레로 말러 1번 교향곡 피날레의 제2주제와도 비슷하며 다소 탐미적인 곡상이 인상적이다. 그후 발전부에서는 1주제의 전개가 이루어지는데 푸가토처럼 시작하여 감7도 화성을 동반한 시퀀스적인 전개를 하다가 트라이앵글의 울림 속에 제1주제의 일부분이 갑자기 씩씩한 무곡풍으로 돌변한다. 곧 제1주제가 짧게 재현되는데 원조성에도 벗어나 있어 (F#단조) 발전부의 말단으로 볼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는 그 뒤의 제2주제 부분이 재현부의 시작점처럼 들린다. 그리고 B장조로 제2주제를 찬가처럼 크게 부풀리는, 전곡을 통틀어 클라이막스라고 할만한 부분이 도래한다. 하프가 아래에서 위로 넘실거리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모두 선율을 노래한다. 어떻게 들으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절정부분이 생각나기도 하는 부분이다. 글 출처 : Go! Classic
연주자 : Leonard Bernstein
번스타인은 1918년에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러시아 Rovno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샘 번스타인은 회사원이었으며, 처음에는 번스타인의 음악에 대한 관심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번스타인은 종종 루이스(아들의 별칭)를 오케스트라 공연에 데려갔다. 한 번은 번스타인이 피아노 공연을 듣고 곧 마음이 사로잡혀서 곧장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번스타인은 보스턴 라틴 스쿨에 다녔다.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졸업한 후, 번스타인은 하바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월터 피스턴에게서 음악을 배우고,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지휘를 프리츠 라이너에게서 배웠다. 커티스에 있는 동안, 번스타인은 또한 Helen Coates와 Heinrich Gebhard에게서 피아노도 배웠다. 그는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그리고 교육자로서 크게 인정받았고, 특히 대중들에게는 장기간의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했으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음악을 썼다. 또 세 개의 교향곡, 두 개의 오페라, 다섯 개의 뮤지컬 음악 외에 다수의 작품을 썼다. 번스타인의 정치적 성향은 확고한 좌파였지만, 다른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반에, 그는 [흑표범단(Black Panther Party)[1]을 위해 자선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다. 1943년 11월에, 그는 아픈 브루노 발터의 대역으로 뉴욕 필을 지휘해 지휘자로 데뷰했으며, 즉시 성공을 거뒀다. 1949년에 그는 올리비에 메시앙이 작곡한 튀랑갈릴라 교향곡을 세계 초연했다. 1957년에 그는 텔 아비브에서 Mann Audiotorium의 개관 공연을 했으며, 거기에서 많은 녹음을 진행했다. 1960년대에, 그는 미국에서 공영 텔레비전을 위한 《청소년을 위한 연주회》 시리즈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의 작곡은 유대교 전례 음악(특히 그의 교향곡 1번과 3번, 그리고 치체스터 시편), 구스타프 말러, 조지 거슈인, 그리고 그의 친구 아론 코플랜드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89년의 크리스마스 날(12월 25일)에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식의 일부로서 연주했다. 공연은 20개국 이상 100만 명 가량의 청중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 때에, 번스타인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바꿔서, 단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는 베토벤이 우리에게 그의 축복을 내렸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번스타인이 말했다. 번스타인은 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는 지휘자였으며,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며 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구스타프 말러, 아론 코플랜드, 요하네스 브람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당연히 그의 자작곡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의 지휘 양식이 신파조에 짜증나게 하고 주의가 산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휘하면서 춤추고 발작하듯이 기뻐하고는 했던 것이다. 번스타인의 개인사는 지휘자로서의 영광, 작곡가로서의 생산성, 그리고 그의 열정 넘치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한 비판 사이에서 고통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번스타인은 또한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그의 양성애적 성향 사이의 충돌을 느꼈다고도 전해지지만, Arthur Laurents(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번스타인의 조력자)는 Charles Kaiser(《The Gay Metropolis》의 저자)에게 번스타인은 단지 “결혼한 게이였다. 그는 전혀 충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게이였다”라고 말했다. 다른 번스타인의 친구인 Shelly Rhoades Perle는 번스타인의 전기작가인 Meryl Secrest에게 자신은 “그가 성적으로는 남성을, 감성적으로는 여성을 원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번스타인은 그의 만년에 우울증 발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의 여배우인 Felicia Montealegre와 1950년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Montealegre는 번스타인의 세 번째 교향곡인 《Kaddish의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과의 연주에 화자(본래 이스라일 출신의 전설적인 여배우 Hanna Robina가 공연했던 역할)로 참여했다. 그 자신은 한 명의 사랑하는 아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번스타인은 음악 세계에서 그의 난잡한 성생활로 악명높았다. 부부는 1970년대에 그녀가 번스타인이 여러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에 이혼했다. 그의 아내와의 결별 이후에, 번스타인은 1971년부터 그의 파트너였던 Tom Cochran과 살았다. 그는 그의 아내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아프게 되었을 때에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돌아왔다. 닉슨 대통령을 암살하려 시도했던 정신병자 Samuel Byck은 그의 계획의 세부를, 한 사람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존경했던 번스타인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번스타인은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