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작품 개설 및 배경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가을의 황혼같은 적막함과 쓸쓸함을 보여주는 음악이다. 아련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명상적인 이러한 작품은 대중적인 인기를 폭넓게 얻기가 어렵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비운의 여류 첼리스트 자클린느 뒤 프레(Jacqueline du Pre)로 인하여 유명해진 음악이기도 하다. 영국 남부의 써섹스 지방의 도버해엽을 마주보는 아주 한적한 곳에 위치했었던, 그리고 엘가에게는 브린크웰(Brinkwells)이라 불리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던 오두막에서 1919년 여름에 이 첼로 협주곡은 완성되었다. 1918년 엘가는 60세의 노인으로는 견디기 힘든 편도선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의식이 돌아오자 그는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하여 멜로디를 적어 나갔다고 하는데 , 이것이 첼로 협주곡의 첫번째 테마가 된 것이다. 퇴원 후 부인과 그는 써섹스의 오두막으로 내려와 건강을 회복을 위한 은퇴 생활을 하며 1918년에만 부인이 악보를 대필하면서 3 개의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곡들이 다음 해 봄에 초연된 후에 엘가는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첼로 협주곡이 1919년 10월에 런던에서 있은 후 몇개월 되지 않아 그의 부인은 타계하였으며 이것은 엘가의 작곡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즐거움과 멋이 가득했던 前작품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이 협주곡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직관하게 되면서 엘가는 이 작품을 외면하였다고 한다. 작품의 구조 및 특징 이 곡은 독특한 구성에 바탕을 두고 지극히 간결한 곡이다. 전곡은 4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의 1, 2 악장과 뒤의 3, 4 악장을 묶어 거의 휴식 없이 진행한다. 레치타티보는 각 악장의 첫머리를 장식할 뿐 아니라 곡 중간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동기나 주제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3악장의 주제가 4악장에서 교묘하게 취급된다거나 마지막에 1악장의 레치타티보를 다시 가져오는 등 구성에서 뛰어난 독창성을 보인다. 특히, 제 3악장 아다지오 Bb장조 8분의 3박자로 되어있지만 명상적인 분위기를 구축하며 협주곡의 중심을 이룬다. 영국 에어(아리아)풍의 멜로디를 느린 속도로 최대한 확대하고 전조를 수단으로 하여 낭만적이며 서정적 아름다움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은 마치 질문을 던지듯 V7화음을 페르마타로 길게 울린 다음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진다. 첼로 독주의 기교적인 부분이 관현악과 더불어 과장됨 없이 간결하게 정수만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실내악적이다. 한편 반음계적 전조로 화성적 색채를 짙게 하는 양식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듯하며, 감정의 내면적 성향에 있어서는 슈만이나 브람스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중후한 영국인다운 품격을 갖추고, 적당히 낭만적 서정성을 내포하며, 담담하고 애잔한 우수를 띤 곡으로 엘가의 최후의 대작에 걸 맞는 평가를 받는 곡이기도 하다. 1악장 모데라토 e단조 9/8박자 먼저 느린 서주로 시작되는 데 몽롱하게 떠오르는 온화한 제1테마가 이 악장을 지배하는 주된 악상이다. 제2테마를 사이에 두고 다시 주된 악상이 나타난다. 처음에 독주 첼로가 아다지오 마단조 4/4박자의 장중한 서창을 제시하면 보통 테마의 9박자로 바뀐다. 독주는 여러 갈래로 변해 가면서 테마를 반복한 후 조용히 쉰다. 12/8박자. 목관이 여리게 연주하는 모티프에 따라 첼로가 제2테마의 모티프를 연주하는데 명확한 현태가 아니라 변주하여 노래한다. 다시 9/8박자로 돌아가 제1테마가 표정을 바꾸어 나타난 후 조용히 제2악장으로 넘어간다. 2악장. 알레그로 몰토 G장조 4/4박자 ☞ 스케르초풍의 명랑한 느낌의 경쾌한 곡이다. 독주 첼로는 자잘한 기교로 16분음표를 발전시킨다. 빠른 템포에 이르러 독주 첼로가 제1테마를 제시한 후 짧은 카덴짜를 사이에 두고 모티프를 반복한다. 다시 제2테마가 나타나서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독주 첼로가 눈부시게 활약하는 경쾌한 ☞ 스케르초라 하겠다. 3악장 아다지오 내림 B장조 3/8박자 낭만적인 아름다운 가요악장이다. A - B - C이 3개의 선율이 A - B - C - B - C - B - A의 순서로 나타난다. 느린 발상으로 동경하는 듯한 선율이 아름답게 노래한다. 이것이 여러 갈래로 변화를 보이는데 선율의 테마는 시종 첼로로 리이드된다. 그리고 반마침으로 다음 악장에 넘어간다. 4악장 알레그로 e단조 2/4박자 서주와 카덴짜로 제1테마를 인도한다. 오케스트라가 활발하게 제1테마의 동기를 연주하면 모데라토 4/4박자로 바뀌는데 독주 첼로가 그것을 ☞ 레치타티보풍으로 노래한다. 알레그로 마 논 트롭포 2/4박자. 제1테마가 기운차게 시작되는데 이는 첫머리의 ☞ 레치타티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 곡 중에서 가장 명쾌한 힘이 된다. 제2테마는 G장조로 나타나 반복되며 몇 번이고 튀면서 다음으로 진행된다. 다시 판타지풍의 악상으로 진전되어 독주 첼로는 이를 화려하게 표현하는데 제2테마는 C장조로 나타나 변주된다. 얼마 후 포코 피우 렌토 4/4박자로 변하여 감상적인 반음계를 포함한 경과적인 악절이 나타나며 점차 3악장의 낭만적인 기분으로 소생한다. 다시 3/4박자로 바뀌어 3악장의 정열적인 선율이 느리게 내림 A장조로 회고적인 재현을 한다. 그것이 지속음로 조용히 정지하면 제1악장의 첫머리에 나타난 아다지오의 서창이 제시되어 당당하게 연주한다. 알레그로 몰토의 율동적인 종결부에서 힘차게 끝난다. (연주시간 약 29분) 글 출처 : 클래식 명곡 대사전(세광음악출판사)
연주 : 뒤 프레(Jacqueline Mary Du Pre)
낙천적인 미소 뒤에 가려진 죽음의 그림자 비가 내리는 어느 깊은 밤, 그날 따라 우리는 아주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을 내 자취방에 불러모으고 뒤 프레의 첼로협주곡(엘가)을 틀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나는 모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밖으로는 비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자클린느의 보우잉은 힘차게 현을 긁었다. 연주가 끝나고 친구는 자클린느의 사진이 담긴 CD재킷을 들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쩐지 이 여자는 일찍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친구는 뒤 프레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그 활달한 미소를 바라보면 어딘지 모르게 요절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뒤 프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요절한 천재들에 대한 선입견 탓일 수도 있고, 그녀를 앗아간 병명이 ‘다중 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금세기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로 꼽힌 그녀가 너무나 일찍 무대를 떠나야 했던 것에 대한 우리들의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바비롤리 경 지휘의 EMI음반)은 아마도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명반 중 하나이다. 순박한 미소와 넘치는 힘의 첼로 연주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클린느는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 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 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네 살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고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16세가 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고, 65년엔 뉴욕에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널리 각광을 받으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이던 68년에는 가족이 탐탁치않게 여기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고, 28세 되던 73년,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려 사실상 연주 활동의 막을 내려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다니엘 바렌보임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지는 못하지만 그와의 결혼이 재키(뒤 프레의 애칭)에게 음악적으로 좀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역시 바렌보임에 의해 뒤 프레가 좀 더 많은 순회 공연과 바렌보임이 지휘자로서 초기의 캐리어를 쌓는 동안 협연자로 혹사당했다는 인상 역시 감추기 어렵다. 어쨌든 뒤 프레가 다니엘 바렌보임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태인이었던 바렌보임을 따라 중동과 전쟁(6일 전쟁) 중이었던 이스라엘까지 날아가 이스라엘 교향악단과 협연한 사실만 하더라도 뒤 프레의 그에 대한 사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서 유태인으로 개종한 뒤 프레는 이스라엘 수상인 벤구리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 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연주는 너무나 힘에 넘쳐 현을 끊어먹는 실수를 저지를 정도였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주에 대해 "그녀는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고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황홀함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불행이 그녀를 덮쳤다. 1970년 무렵 그녀는 눈에 띄게 피로해 하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해질 때가 많았고, 손가락이 저리며 차가워지고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볼품없어져 갔다. 병에 걸린 뒤 프레는 차츰 병의 증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생활과 다중경화증 발병 뒤 프레는 아주 가끔씩 자신의 이런 증상을 남편에게 털아놓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바렌보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바렌보임은 연주자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그녀의 연주가 필요했다. 재키가 리허설이나 연습 때 자주 템포를 놓치게 되자 바렌보임은 그때마다 뒤 프레를 혹독하게 몰아부쳤다. 이를테면 그녀의 정신력이 해이해진 탓이라는 것이 바렌보임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뒤 프레 역시 자신이 아픈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5회씩 프로이트 학차의 정신분석가인 월터 조피에게 진찰을 받으러 다녔다. 그러는 중 그녀의 연주에 대한 악평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치게 한다"던 그녀의 연주는 차츰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는" 연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서웠다.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온 데 대해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둘러댔다. 결국엔 아마 도로변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뒤 프레가 연주 중에 활을 놓쳐 버릴 지경이 되어서야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가 '다중경화증'이란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자신의 정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렌보임의 질책이 얼마나 심했으며 그녀 자신이 그로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병으로 인해 더 이상 순회공연에 따라나설 수 없게 된 자클린느 뒤 프레는 그 후 음악 교육에 정열을 바쳐 78년에 맨체스터의 솔포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요마와 린 하렐의 스트라디바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뒤 프레가 이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1987년,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42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녀의 연주는 남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힘과 넘치는 표현으로 마치 톱질이라도 하는 듯 힘찬 보우잉과 순진하고 솔직한 동작으로부터 발산하는 순수한 열정이 돋보였다. 그녀는 병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항상 웃음을 간직한 낙천주의자였고, 자신감에 넘쳐흘렀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그런 낙천적 성격과 자신감이 그녀의 연주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듯 했다. 이런 그녀의 연주를 한편에서는 자신을 활활 태워 만들어 낸 음악’이라고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수명과 기를 짧은 기간에 소진했기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었다. 그녀가 잃어 버린 것은 첼로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최후의 비참했던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두 다리, 양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어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화의 다이얼 돌리는 일도, 돌아눕는 일도 그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 프레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고 차츰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 뒤 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에는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라도 자클린느 뒤 프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몸이 찟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눈물 조각처럼"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언젠가 영국 BBC에서 제작한 그녀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자신의 어머니 무덤에도 가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녀의 무덤에 단 한 차례도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가 설령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 실제로 그의 연주와 지휘는 훌륭한 것들이 있다. - 그의 음반은 사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적이 있다. 자클린느 뒤 프레는 남편이 한 번도 찾아와주지 않는 무덤에 홀로 누워있다. 글, 이미지 출처 : 바람구두 연방의 문화 망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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