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Concerto No.2 in f minor, op.21
작품 개설 및 배경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쇼팽의 첫사랑이었던 콘스탄티아에 대한 젊은 날의 연민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2악장 라르게토는 첫사랑 콘스탄티아에 대한 청춘의 애환과 순정이 그대로 건반으로 옮겨져 건반 하나하나에 쇼팽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쏟아 질 듯이 아름답다. 별이 많은 밤에 이 대목을 들어 보면,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이 모두 별을 그려내는 듯하여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쇼팽이 혁명의 불꽃을 피하기 위해 고국 폴란드를 떠났던 것은 1830년 11월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바르샤바에서의 공개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폴란드의 흙을 밟지 않았던 쇼팽. 그가 남긴 2곡의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파리로의 망명 직전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이 두 작품은 그 작곡배경에 있어서 공통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두 곡 모두 쇼팽의 안타까운 첫사랑이었던 여가수 콘스탄쩨 글라드코브스카(Konstanze Gladkowska 1810-1889)에 대한 사랑으로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이 곡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비록 쇼팽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나기는 했다지만 쇼팽은 자신의 음악원 후배이기도 했던 이 오페라 여가수를 끔찍히도 사랑했던 것이고 그녀에 대한 바로 그러한 뜨거운 마음으로부터 이같은 감미롭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피아노 협주곡들이 탄생케 되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고전주의적 소나타 형식을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시작부분은 당당하고 거만한 듯한 f단조의 제1주제와 훨씬 서정적인 A플랫 장조의 제2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제1주제와 제2주제는 모두 오케스트라에 의해 먼저 제시되고 그 후에 건반악기다운 매력적인 장식음들을 수반한 아름다운 독주부가 뒤따른다. 발전부와 재현부 전체를 통해 피아니스틱한 기교가 매우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형식적인 카덴짜는 필요없다. A플랫 장조의 느린 악장은 젊은 쇼팽이 당시 유행하던 이태리 오페라의 벨칸토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악과(科) 학생이었던 콘스탄티아 그라드고프스키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관현악의 반주가 곁들여진 녹턴 같은 양식으로 시작과 끝 부분에서는 섬세한 장식음들로 꾸며진 아름다운 노래가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가운데 부분은 정열적이다. 가벼운 왈츠로 시작하는 마지막 악장은 현악기의 인상적인 꼴 레뇨(활등으로 연주하는 것) 반주 위에 마주르카 같은 제2주제를 갖고 있어 민족주의적인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자유로운 발전부와 재현부에서 쇼팽은 특별한 상상력을 자극했음이 틀림 없다. 적어도 협주곡이 F장조로 돌아오고 있음을 알리는 혼의 울림이 얼마나 훌륭하게 변형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해설: 곽근수의음악이야기 제1악장 Maestoso (마에스토소) f단조 4/4박자 소나타형식. 처음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제시부가 나오고 그 후 제1테마가 노래조로 나타난다. 다시 오보가 제2테마를 연주한 후 제1바이올린이 이어받고 피아노로 넘어간다. 제2악장 Larghetto (라르겟토) A장조 4/4박자 자유로운 론도형식. 첫사랑의 소녀를 생각하며 작곡한 이 곡에는 정서가 충만하게 흘러 넘치는데, 쇼팽의 순정이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형태는 녹턴형식을 띠고 있는데, 처음에 우아하고 달콤한 테마가 반복된다. 예리하고도 어둡고 정열적인 중간부를 지나 테마가 재현된다. 제3악장 Allegro vivace (알레그로 비바체) F단조 3/4박자 론도형식. 제1테마가 피아노로 연주된다. 전악장은 마주르카풍의 리듬을 가진 테마로 구성된다. 향토성이 짙고 화려하게 즉흥적인 발전을 보이는 환희에 찬 악장이다. 글 출처 : 클래식 명곡 대사전(세광출판사)
피아노연주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ur Rubinstein
폴란드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언제나 "무대에 나오는 것은 나의 즐거움, 나의 기쁨 입니다."라고 말한 진정한 낭만주의의 거장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폴란드는 쇼팽 이후에도 뛰어난 피아니스트를 많이 배출해낸 나라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파데레프스키, 고도프스키, 요제프 호프만 등의 대가들을 열거할 수 있는데, 루빈스타인도 의심할 바 없는 폴란드가 낳은 피아노의 거장 중 한 사람이며, 19세기 낭만파 거장들의 전통을 오늘날에 전하는 귀중한 피아니스트이다. 의자에 기어올라갈 수 있는 나이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만년까지 전혀 빛바래지 않은 탁월한 연주를 들려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따뜻하고 시적이며 귀족적인 해석의 연주자였다. 쇼팽이래 최고의 쇼팽연주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자유분방한 낭만적 정취를 피아노에 듬뿍담아내던 인물이었다. 루빈스타인은 1887년 1월 28일 폴란드의 로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3살때 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4살때엔 공개연주회에 출연할 정도로 대단한 신동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피아노에 심취한 그는 7살때 고향의 자선콘서트에서 모차르트, 슈베르트, 멘델스존을 연주했다. 바르샤바에서 로지스키 교수에게 사사했으며, 교수는 그의 뛰어난 재능에 놀라 당시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에게 소개했다. 루빈스타인은 10살때인 1897년, 요하임의 추천으로 베를린에 가서 리스트의 제자였던 카알 하인리히 바르트(Karl Heinrich Barth, 1847-1922)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게 되었고, 로베르트 칸, 막스 브루흐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웠다. 1897년에는 러시아 순회공연을 떠나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러시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재래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1899년 포츠담에서 첫 콘서트를 가진 이후 독일과 폴란드 투어를 계속하였다. 13살때 베를린에서 모차르트의 협주곡으로 데뷔했는데, 그때 지휘자는 바로 요제프 요하임이었다. 루빈스타인은 요하임의 추천으로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 1860-1941:폴란드의 피아니스트로 후에 폴란드의 수상이 됨)에게 사사한 뒤 16살때 파리로 갔다. 이 무렵 생상스는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듣고 경탄하여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연주가"라고 평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폴란드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또 바이올리니스트 외젠느 이자이(Eugene Ysaye)와 함께 연합군을 위한 30회의 연주를 열었다. 1916년 스페인 순회연주를 통해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 단 4차례의 공연이 무려 120회까지 연장될 정도였다. 1919년에 루빈스타인은 처음으로 도미하여 무려 75회의 연주를 열어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그러나 그런 인기의 보람도 없이 비평가들은 "미완성의 대기"라고 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비평가들로 부터 여러가지 문제가 지적되었는데, 당시의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폭발적인 연주 효과를 겨냥하고 있었던 반면에 세부의 거친 음이 문제가 되었고, 복잡한 음은 자주 빼먹고 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계기로 루빈스타인은 4년 동안 무대에서 사라져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짧은 기간 안에 자신의 약점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1922년부터 1937년까지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주법을 개선하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의 따뜻함과 정열을 유지하면서 조형력을 강화하고 기교적인 조잡함을 제거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 그의 연주는 대성하여 1937년 미국 연주회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때 유명한 평론가 올린 다운즈(Olin Downes)는 그의 빛나는 기교를 절찬하여 "6개의 손과 30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빈스타인은 그대로 미국에 정주하여 1946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으며,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 에마누엘 보이어만(후에 Gregor Piatigorsky로 개명함)등과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만들어 실내악에서도 그의 명성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1954년 할리우드를 떠나 파리로 향하게 되고 유럽에서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청중들의 열광을 받았다. 그는 거의 70이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때 백발을 휘날리면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의 음악가들에게 하나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세월과 더불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고 기교적으로는 보다 세련되어 갔다. 특히 1960년대를 고비로 그의 연주는 많은 변화를 갖는다. 그 이전의 그는 영화 <카네기 홀>에서 그 풍모를 과시했듯이 찬란하고 화려한 스타일이였다. 그러나 그 반면에 스케일은 크지만 강한 표현법으로써 모든 곡을 그의 개성으로만 물들였다는 지적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의 변화는, 억센 것을 청산하고 단정유려하고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여유있는 음악을 들려주게된 것이다. 즉, 본래의 호방한 외면적 효과에 원숙한 인간미가 곁들여짐으로써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 루빈스타인의 음악은 50세 무렵부터 평형이 잡힌 것으로 정리되고, 기술적으로도 보다 투철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70세 무렵부터 세련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활동은 50세까지가 전기, 70세까지가 중기, 그 이후가 후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는 루빈스타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또 한사람의 쇼팽 전문 연주자였던 호프만(Jozef Kazimierz Hofmann,1876-1957)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본인의 말처럼 루빈스타인의 쇼팽 연주는 비교적 주관적이었으나, 자유롭고 깊이가 있으며 부드러운 호소력이 깊게있다. 그의 쇼팽은 작품에 대한 기본 정서를 섭렵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기에 그를 최고의 쇼팽 전문가라 불러도 틀림이 없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더불어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불려졌고 음악 못지않게 와인에도 달관한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휴머니스트 였다. 아울러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았던 피아니스트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희망이라고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삶은 전혀 탈출구를 보여주지 않고, 오직 바랄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낡은 옷에 묶여진 벨트를 끌러 천정에 매달았다. 의자를 받치고서 내 목을 걸었다. 그러나 의자를 차는 순간, 벨트가 끌어지면서 나는 바닥 내동댕이쳐졌다. 내 첫 반응은 일종의 쇼크같은 것이었다. 나는 울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피아노에 앉아 한숨을 쉬고 다시 울었다. 내가 그렇게나 사랑했던 음악이, 내 모든 감정의 진정한 동반자였던 음악이, 나를 이렇게나 비참한 길로 인도했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소시지 두개만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다가 나는 갑자기 멈춰섰다.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나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계시나 강림같은 것이었다. 나는 마치 처음 눈을 든 사람처럼 내 주위를 살폈다. 거리와, 나무와, 집과, 달려가는 강아지와, 남자와, 여자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도시의 소음들까지도 다르게 들렸다. 삶은 놀라운 것이었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었다. 설령 감옥에 갇혔거나 병들어 누워있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까지도 강하게 믿고 있다. 삶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관계 없이 사랑할만한 것이라고...." - 루빈스타인이 21살 적 어느 날 자살을 실패하고 적은 글 - 글출처: 유럽 클래식 산책(예담 출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