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es Brahms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1988/01 (ⓟ 1989) Stereo (DDD)
Philharmonie, Berlin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작품 개설 및 배경

브람스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기도 한 이 교향곡은 가을의 우수를 띠면서도 낙조의 서글픔보다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따스함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52세라는 때 이른 나이에 마지막 교향곡을 썼다는 것은 브람스가 조락의 가을을 너무 일찍 맞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교향곡을 작곡할 무렵, 브람스는 친구들과의 불화라든가 그 밖의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고독감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만, 이 교향곡에는 그런 고독감이 스며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달관의경지를 보여준다.

이 교향곡이 작곡되었던 곳은 뮈르츠슐라크라는 알프스 산언저리의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은 너무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봄은 늦게 찾아오고 가을은 빨리 왔다가 과일이 채 익기도 전에 겨울이 닥쳐온다. 그러나 브람스는 이 고장이 퍽 마음에 들어 작곡의 진행도 순조로웠다.

교향곡 1번에 나타난 비창감이라든가 2번에서 느낄 수 있는 평화로운 정적과 충일감, 3번과 같은 호쾌함 등과는 다른 정취가 풍겨나지만, 더욱 심화된 브람스의 의식세계가 예술적인 차원에서 구현된다.



작품의 구성과 특징

이곡은 제 3번 교향곡을 작곡한지 얼마 후인 52세 때에 쓴 것인데 노년기에 이른 브람스의 심경의 깊이가 나타나 있다.
그의 다른 3개의 교향곡과는 달리 곡의 성격도 퍽이나 고립되어 있고 애수가 잠긴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이 제 4번 교향곡은 초기에는 일반에게는 물론 친구 들에게 까지도 잘 이해되지 못 하였으며 니이만과 같은 이는 이 교향곡 을 비탄적 인 것이라고까지 평했다.
그러나 그 후로 이 제 4번 교향곡은 많이 연주 되었으며 브람스가 죽기 25일 전에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연주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1악장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늦가을에 낙엽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환상이 보이는 것만 같다. 처음 듣는 사람이라도 바로 이 곡의 끌려 들어가버릴 만한 매력을 가진 선율이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해서 차츰 긴장감이 감도는 전개를 해 나가고 종결부에서는 크게 부풀어 올라 웅장한 클라이맥스를 구축한다.

2악장은 조용한 분위기의 서정적인 악장으로 폭넓은 감정의 폭을 가지고 있고, 3악장은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의 활달한 악장이다. 4악장은 바로크 시대에 사용되던 파사칼리아 형식으로 작곡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파사칼리아는 저음부의 주제로 시작되어 점차 고음부로 변주해 가는 바로크 시대에 많이 작곡되던 일종의 변주곡 형식인데 마치 웅장한 건축물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곡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제 4번에서 마지막 악장에서 사용된 파사칼리아는 여기에 비극적인느낌을 더하여 큰 감동을 준다.

1악장 Allegro non troppo E단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서주부 없이 길고 느릿한 제1테마가 현악기로 시작되는데 목관이 자유롭게 교대하면서 전개되어 나간다.
제2주제는 서사적이면서도 로맨틱하며 발전부는 부드러운 멜로디로 전개되면서 즐겁게 또는 극적인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된다.

재현부는 탱고풍의 리듬을 거쳐 선율적으로 흘러가며, 코다는 힘차고 웅장하다.

제2악장 Andante moderato E장조 6/8박자 소나타 형식.
아름다운 꿈을 보는 것 같은 황홀한 세계로 이끌어 가는데 로맨틱 한 애수는 브라암스의 궁극적인 표현을 이루고 있다.
옛날 프리지아 교회조를 생각케 하는 제1테마에 대해 첼로로 연주하는 극히 서정적인 면을 보인다.

3악장 Allegro giocoso C장조 2/4박자 론도 형식.
익살스런 성격을 띠고 있으며, 빠르면서도 즐거운 기분으로 연주하는 이 악장은 약동하는 힘과 긴장감이 감도는 듯한 느낌을 준다.

Lento의 트리오에는 혼이 목가적인 선율을 연주하는데 일종의 숲의 정경을 연상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선율 구성이나 화음 구조를 쉔커식으로 분석하면 2악장의 주제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멜로디의 골격이나 화성구조는 피날레의 제2주제에도 같이 적용되어 일종의 순환양식처럼 느껴지게 된다.
후반부에 삽입된 하프의 매혹적인 글리산도는 마치 라벨이나 림스키코르사코프 같은 분위기를 전달한다.

4악장 Allegro energico passionato e단조 3/4박자 팟사칼리아 형식.
장엄하고 웅대한 느낌이 드는 일종의 변주곡으로서 고전 무곡의 형식이다.
처음에는 트롬본을 사용 했으며 거기에 목관과 혼이 첨가되는데 이같이 치밀한 대위법적 브라암스 음악가로서의 한 모습을 보여 준다.

글 출처 : 클래식 명곡 대사전(세광출판사)
지휘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출세를 위해 서슴없이 나치에 입당했고, 세 번 결혼했으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를 듣기 위해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연주회장을 들락거렸지만 그의 사후엔 단 한 차례도 자신의 선배 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를 위한 추모 연주를 하지 않았던 카라얀.
30년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자신의 라이벌에겐 가혹한 처벌자로, 추종자들에게는 제왕으로 군림했던 이 사람. 코카콜라만큼 유명했고 음반 산업의 총아로 막대한 부와 명성을 누렸던 지휘자. 카라얀. 이제부터 그의 세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 일요일에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또 다른 유명한 음악가는 모차르트였다. 다만 모차르트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무너져 가는 부르주아지의 세계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이들을 맘껏 조롱하는 듯한 음악들을 만들어냈다면 카라얀은 시대의 흐름과 대세를 잘 이용하는 영악함이 있었다.
카라얀의 성 앞에는 귀족임을 의미하는 독일어 von이 붙는데, 그의 조상들은 그리이스 출신이었으나 오스트리아에 정착하며 귀족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카라얀은 늘 자신보다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이던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성장했는데 그는 형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형에게 피아노를 뒤지지 않겠다는 단순한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스스로 밝히고 있는 대로 카라얀은 어릴 적부터 남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잘 털어놓기 어려운 성격이었고, 그런 성격으로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런 성격 탓에 더욱 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형에 공대에 입학하자 따라서 공대에 입학했으나 자신의 재능이 그쪽에 있지 않음을 간파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열심이었던 피아니스트의 길 역시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은사였던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 (Bernhard Paumgartner)의 조언에 따라 지휘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1929년까지 1년반동안 빈에서 집중적으로 지휘 공부를 하게 된다.

마침 그에게는 다른 이들 보다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당시 빈 국립가극장의 건물 관리자 겸 감독관이 바로 카라얀의 숙부였다. 이 숙부는 조카인 헤르베르트에게 유명한 지휘자의 연주회나 비공개 연습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고, 카라얀은 이곳에서 브루크너의 제자 프란츠 샬크, 리하르트 슈트르우스,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등의 지휘 모습과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솜씨를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이런 배경적인 요소들만 작용하여 그를 지휘자로 대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라얀 자신의 집요한 노력이 그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아르투르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탄호이저>를 듣기 위해 잘츠부르크에서 바이로이트까지 250마일이 넘는 거리를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는 일화는 그의 이런 열정과 성공을 향한 집요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카라얀의 스승들 - 파움가르트너,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나치당

카라얀의 음악 인생에 나타난 스승들의 모습이 늘 그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고, 카라얀 자신 역시 그들에게 늘 호의적인 모습으로 다가선 것은 아니었다.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는 카라얀의 청소년 시절의 음악적 스승이자 아버지에 해당하는 인물로 자신의 합창단에 들어 온 어린 카라얀 형제를 아버지처럼 사랑하였고, 그중에서도 헤르베르트의 음악적 재질을 눈여겨 보았다.
그에게 지휘자의 길을 권유한 것 역시 파움가르트너였다. 그는 카라얀의 어린 시절을 예술적 분위기와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여러 경험들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파음가르트너가 카라얀을 제자로 둔 것이 행운이었는지 카라얀이 그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파움가르트너는 192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탄생과 성장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훗날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1971년 7월 27일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총재를 역임했다.
카라얀에게 있어 잘츠부르크를 고향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 될 수 있도록 밑거름을 제공해준 인물은 다름아닌 파움가르트너였다.

앞서 카라얀이 아르투르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탄호이저>를 듣기 위해 250마일의 거리를 오토바이를 타고 왕복했다는 일화를 이야기했다.
카라얀의 토스카니니에 대한 존경은 그의 음악적 스타일을 따르는 방식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를 통해 지휘가 지닌 힘과 마력을 깨우쳤던 것 같다.
그는 1930년대 초 빈에서 토스카니니 지휘의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팔스타프>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들으며 평범해 보이는 선율의 세부를 약간 바꾸는 것만으로도 곡의 전체적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배웠다.

카라얀의 토스카니니에 대한 존경은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베를린 국립오페라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장송곡>을 지휘하고, 1967년 토스카니니 서거 1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휘자로서 카라얀이 평생동안 갈구했으나 영원히 얻지 못한 것, 능가하고 싶었으나 그에 이르지 못한 카라얀의 빛과 그림자를 이루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였을 것이다.
때때로 카라얀의 음모가적 기질에 희생당한 인물로, 라이벌로 비춰지는 칼 뵘이나 세르쥬 첼리비다케는 카라얀의 경쟁자로 혹은 잠정적 경쟁자로 비춰졌기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그 자신이 결코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던 인물은 푸르트벵글러였다.
그것은 푸르트벵글러가 지니고 있는 예술적 깊이와 인격의 풍모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카라얀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능가할 수 있는 지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예술가와 장인의 차이라고 한다면 너무 한 말이 될까?)

푸르트벵글러는 일생을 두고 카라얀을 싫어했다. 그는 카라얀의 집요함, 성공을 향한 집요한 야망을 일찌감치 간파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1929년 잘츠부르크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카라얀의 이때 나이는 불과 20세 무렵이었다. 그리고 카라얀은 울름시립오페라가극장의 전속 지휘자로 계약을 맺는 등 초고속으로 성공의 계단을 밟아 나갔다.
젊은 카라얀은 출세를 원했고, 시대는 그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4년에 이르러 아헨에서 <피델리오>를 연주한 카라얀은 이듬해(1935년) 아헨의 음악총감독이 되며 독일 음악계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그는 시골의 무명 지휘자에서 일약 대도시의 유명 지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이때 성공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독일 나치당에 팔아넘긴다. 아헨의 음악감독이란 직책을 얻기 위해 그는 주저없이 입당했고, 훗날 <뉴요커>지와의 인터뷰에서도 "그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떠한 범죄라도 저질렀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카라얀은 자신의 입당이 1934년 봄 울름과의 계약이 끝난 뒤 실업자로 몇 개월을 고생한 끝에 아헨의 직책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며 이후 1942년 아니타 귀터만(그녀에게는 유태인의 피가 1/4 정도 섞였다고 한다.)과의 재혼 이후에는 나치당을 탈당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밝혀진 자료들에 의하면 카라얀의 나치당 입당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뒤인 1933년 4월 8일 독일 내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행해진 일주일 뒤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1935년이라고 주장한 카라얀의 공식적인 입장은 조금이나마 늦게 입당한 것으로 하여 연합국의 판결에서 가벼운 형을 받기 위한 술책이었음이 드러났다.
더군다나 카라얀이 주장하듯 당시 독일 음악계에서는 유태계 음악인들을 축출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일자리를 걱정할 염려는 없었다. 독일 패망 때까지 나치당원의 신분을 유지한 것은 물론이다. 카라얀은 성공하기 위해 나치에 자진 입당했고,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카라얀은 1935년 27세의 나이로 독일내 최연소 음악 총감독에 취임한다. 이후 카라얀은 기꺼이 나치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카라얀은 이후 승승장구했고, 나치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푸르트벵글러를 자극하기 위해 혹은 이용하기 위해 카라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결국 1945년 독일군이 항복하자 오스트리아로 송환된 카라얀은 일체의 연주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그가 구원하기 위해 노력한 동료 유태인 음악가들의 구명에 의해 1947년 1월 복권되었고, 1954년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라얀이 빈, 베를린, 잘츠부르크 같은 중요 도시로부터 초청받지 못하도록 했다(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베를린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연주가 금지된 기간 동안 비밀리에 푸르트벵글러의 연주회장을 찾아 그가 지휘하는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카라얀 부부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감금된 채 지내게 되고, 푸르트벵글러의 금지조치가 풀린 뒤에도 카라얀은 연주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그의 두 번째 부인 아니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통역일을 했고, 카라얀은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를 만나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앞으로 다가올 음악 산업의 진원이 음반이 될 것임을 예상하였고, 카라얀 역시 이에 적극 호응했다.
카라얀은 활동금지가 풀린 1948년 이후 그는 빈 필을 맡아 베를린 필에 대항할 만한 오케스트라로 육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나 관계가 악화되어 빈 필을 그만두게 된다.
대신 그는 음반 작업에 치중하며 월터 레그에게 소프라노 슈바르츠코프를 소개한다. 1953년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는 월터 레그와 결혼하고, 이 세 사람의 우정과 계약은 그후의 월터 레그의 죽음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었다.

1954년 11월 카라얀에게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그 전보의 내용은 "왕은 죽었다. 황제 만세!"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카라얀의 앞길을 줄곧 가로막고 있던 푸르트벵글러의 죽음은 카라얀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었다. 더 이상 그의 앞길을 가로막을 상대는 없었다.
푸르트벵글러의 부재 기간 중 베를린 필을 맡았던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에 버림 받은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아마 이때 베를린 필이 카라얀 대신 첼리비다케를 선택했다면, 쓸모없는 상상이긴 하지만 베를린 필이 계속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오케스트라로 존재하긴 했겠지만 단원들의 돈주머니는 좀더 빈약했을 것이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가 그에 대해 드러낸 태도에 대해서 공식적인 불평을 한 적은 없다.
다만 그는 푸르트벵글러가 예술상의 문제로 자신을 질투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우선 푸르트벵글러가 '예술상의 문제'로 카라얀을 질투할 일이 전혀 없었을 것이며 설령 '예술상의 문제'가 맞다 하더라도 그것은 질투가 아니라 카라얀의 예술가 답지 못함에 대한 질책의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이런 질책에 대해 자신의 살아 생전 단 한 번도 푸르트벵글러의 기념 연주회를 지휘하지 않는 것으로 보답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사후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생전에 추진되었던 미국순회공연의 연주를 자신이 맡는 대신 베를린 필의 종신 지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고, 베를린 필은 그의 협박에 못이겨 카라얀과 종신지휘자 자격으로 계약했다.
그가 1956년 베를린 필을 이끌고 처음 미국 순회 공연을 시도했을 때 미국 시민과 언론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을 외면했다. 전직 나치 당원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공연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베를린 필은 1989년 그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스스로 사임할 때까지 30년이 넘게 카라얀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를 듣는 것은 때로 소름이 끼친다. 그것은 마치 정확하게 조율된 복잡한 시계 태엽 장치의 톱니 바퀴들이 정확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카라얀의 인격이나 전력이야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었든 간에 그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은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따라갈 수 없는 놀라운 연주능력을 보여주었고,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스튜디오 녹음과 순회연주를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부를 통해 보답했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그가 남긴 족적이 그만큼 거대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부르주아 예술의 정점에 서서 프랑스 대혁명의 조짐을 예언한 작곡가였다면 베토벤은 부르주아 예술, 정신의 파탄을 예감한 작곡가였다.
그렇다면 카라얀은? 그는 분명히 푸르트벵글러나 브루노 발터 같은 예술가들이 남긴 그 어떤 유산보다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20세기 클래식 음악계는 분명 카라얀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무엇보다 카라얀의 시대에 와서 고전 음악은 더 이상 예술이란 고전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음악은 산업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내면 못지 않게 외면 또한 신경써야만 했고, 지휘자의 지휘봉을 잡은 손은 번번이 스튜디오 녹음 엔지니어들에 의해 제지당하게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카라얀'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된 일은 아니며, 그가 추진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앞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는 20세기라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LP시대를 지나 CD를 맞이했고, 음원을 담는 새로운 매체들이 속속 개발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1980년 소니(Sony)의 사장 아키오 모리타는 카라얀에게 앞으로 디지털 레코드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미리 알렸다. 이를 받아들인 카라얀은 1980년 봄 베를린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처음 디지털로 녹음하며 누구보다도 먼저 디지털 음반 산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CD 연주 시간이 대략 74분으로 결정된데는 카라얀의 의견이(그는 CD의 수록시간을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을 표준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토벤 교향곡 9번이었을까? 이 곡은 잘 알다시피 푸르트벵글러의 연주가 절대명연으로 알려져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본격적인 LP 시대 이전의 인물이었다)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써 카라얀은 CD 시대의 선구자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베를린 필의 종신 지휘자로 계약을 맺은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막대한 수익금을 안겨준 대신 그와 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제왕으로 군림하고자 했다. 이에 마찰을 빚은 많은 음악가들이 그의 곁을 떠났고, 그 역시 때로 상처받고, 때로 상처주며 그들을 등졌다.
베를린 필과의 관계 역시 그랬다. 카라얀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여성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베를린 필 단원으로 추천했으나 단원들이 이를 거부하며 이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84년 마침내 카라얀과 오케스트라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카라얀의 재정적인 욕심까지 거론되어 이들 사이의 분쟁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결국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와 계약상의 이유를 들어 베를린 필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생전에 이미 1992년까지 자신의 계획을 세워놓았는가 하면 죽음 직전에도 소니의 매니저를 맡았던 카라얀이지만 그리고 1989년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니프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날 카라얀은 7월 27일 잘츠부르크 대성당 광장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개회 연주로 거행될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오전동안 연습한 뒤였다고 한다.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는 지금 아니프 마을 오르트스프리베호프 묘지에 묻혔다.

첼리비다케의 사후 그의 음반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생전에 녹음된 음악을 그토록 혐오했던 첼리비다케였지만 그의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깡통에 담겨 일반에게 유통되었다.
푸르트벵글러와 첼리비다케가 고전 음악의 내면적 전통에도 충실한 구시대의 음악가들이었다면 카라얀은 시대의 흐름을 따랐지만 음악적 전통이란 점에서는 나름대로 충실했던 음악가였다.
어쩌면 첼리비다케는 그가 살아 생전에 심취했었다는 불교 철학에 입각해서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기록의 예술이 아니라 순간(찰나)의 예술인 음악의 본질에 가장 충실했던 음악가였을 것이다.

이제 와서 카라얀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음반과 영화, 비디오 등을 통해 불멸을 꿈꾸었던 카라얀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첼리비다케도 기억한다.
인간은 기억함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카라얀의 욕심이 한낱 부질없이 느껴지는 것, 동시에 그의 욕심이 이해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 푸르트벵글러도, 카라얀도, 첼리비다케도, 게오르그 솔티도 떠났다. 신들의 시대에 황혼이 내린다.

출처: 바람구두 연방의 구두망명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