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van Beethoven

Piano Concerto No.3 in c minor Op.37

Glenn Gould (piano)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1957/05/26 (ⓟ 2008) Mono
Konzertsaal der Hochschule fur Musik Berlin Live Recording
Piano Concerto No.3 in c minor Op.37

작품의 개설 및 배경

이 작품은 제2 및 제1협주곡에서 보는 것 같은 선배의 영향은 일소되었으며, 지금까지 실내악적으로 흐르기 쉽던 피아노는 일단 거장적(巨匠的)인 기교를 발휘하고, 반주적으로 되기 쉽던 관현악은 뚜렷하게 각 악기의 특성을 발휘하여 양자의 혼연한 융합을 꾀한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 때까지의 3개의 협주곡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협주곡이다.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다단조 2/2


   그 화려함은 고대의 로마를 방불케 하며(렌츠), 협주곡 제5번에 있어서의 남성적인 웅혼(雄渾)함과는 반대로 여성적인 우미함과 달콤한 애수미가 담겨 있어서, 선율미에 있어서는 확실히 5개의 협주곡 중 으뜸이라 하겠다.

2악장. 라르고 E장조 3/8 3부 가요 형식.


   다장조 협주곡의 제2악장이 장3도 아래의 조를 택했음에 반하여, 여기서는 장3도 위로 잡았으며 효과도 예기치 않은 명랑성을 지니고 있다.

3악장 론도 알레그로 다단조 2/4


   초기의 론도 형식에 따랐으며, 3개의 주제가 사용되어 경쾌한 론도 주제에 쾌적한 제2주제(내림 마장조)가 계속된다. 클라리넷에 의한 제3주제를 지나 론도 주제와 제2주제가 재현되는데, 각 주제는 피아노와 관현악으로 교대되며 반복 연주된다.

글 출처 : 클래식 명곡 대사전(세광음악출판사)
피아니스트 : Glenn Gould (글렌 굴드

굴드와 카라얀 - 세기의 만남, 기묘한 조합 :1957년 베를린 콘서트

31세의 나이에 무대 공연을 완전히 그만둔 내성적인 비루투오소(Virtuoso) 굴드.
제트기 여행자로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지휘대의 스타였으며, 열정적인 오페라 지휘자이자 연출가인 카라얀.
이 둘이 처음 만나 공연한 1957년 베를린 콘서트.

"부조니 이래 이처럼 능란한 피아노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 음악평론가 슈투켄슈미트(당시 공연평 중에서)
"마치 나 자신의 연주를 듣는 것만 같았다."
- 카라얀


젊은 시절의 굴드

글렌 굴드에 대해 Oxford의 'Musician Dictionary'에서는 'Canadian Pianist, Composer and Writer'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굴드는 '전위예술가'라고 불리어야 옳을 것이다. 길지 않았던 그의 생애에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약한 것은 10년 남짓한 시간이며 오로지 레코드를 통해서만 청중들과 접할 수 있었던 굴드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음악에는 살아 숨쉬는 듯 한 생명력이 있었고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기괴함과 참신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골드베르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평균율'이 주는 지루함을 의식할 수 없게 한 것도 바로 굴드였다.
그는 연주회장과 결별함으로서 청중 앞에 서는데에 사용될 노력을 절약했으며 남아도는 열정 전부를 레코드 제작에 투자하였다. 굴드는 우리가 좋지 않은 의미로 흔히 이야기하는 '짜집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연주의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 '짜집기'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청중에 대한 거부감과 편집, 합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음악'에의 매료, 굴드를 대표하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음악가 (musician), 혹은 연주자 (performer)라고 부를 수 없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굴드의 생애

굴드의 다소 유별난 연주방식과 음악 해석은 음악을 배운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이 보 인다.
굴드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1932년 9월 25일에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그 (Edvard Grieg)굴드 외고조부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굴드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얼리니스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많은 전기에서 굴드의 어머니를 '피아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연주회를 가지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굴드가 10살이 될 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굴드가 세 살 되던 해 그는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조그마한 작품을 연주했다. 여섯 살 때에 굴드요제프 호프만의 마지막 토론토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소년 굴드에게 깊고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한다.

캐나다의 저명한 작가인 로버트 풀포드(Robert Fulford)굴드의 이웃집에 살던 아홉 살 때에 그를 만났다(당시 굴드 역시 아홉살이었다).
그는 " 어린아이인데도 글렌은 고독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듯이 연습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조건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교사는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였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 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당시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 - 굴드"피아노는 슈나벨에게 있어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베토벤에 대한 접근이었다" 라고 평했다 - 과 로잘린 투렉의 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고 전한다.
1946년 그는 로얄 코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한다. 이 연주에 대해서 굴드는 그 자신이 슈나벨의 녹음을 2년이 넘도록 소유하면서 듣고 있었고 그 음반의 모든 뉘앙스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하는 데에 다소 각오가 필요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다음 해에 굴드는 같은 협주곡을 토론토 심퍼니와 연주하였고 어떤 비평가는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였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가졌다 (굴드는 뉴욕을 'Debutow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 날 CBS와의 녹음계약을 맺었다.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에 CBS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 때에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되어 버렸지만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 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결국 이 때 제작된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굴드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로 만들게 된다.

1957년에 굴드는 러시아 (당시 소련)에서 2주간 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순회연주를 가졌다.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에서 연주한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으며, 청중과 비평가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이 연주를 해내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유럽순회동안 굴드는 베토벤의 3번 협주곡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연주하였으며 두 사람은 이후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듣고 계시는 이 음악이 그 유명한 음반입니다)

1960년에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 뉴욕 필과 함께 미국 텔레비젼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그는 캐나다의 TV에서 이미 유명인물이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캐나다의 TV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였다.

그런데 굴드는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다. 공식연주회에서 이토록 빨리 은퇴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그의 많은 다른 관심사들을 실현하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굴드는 그 자신의 본업이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는 작가로서의 활동, 방송활동, 작곡, 지휘, 그리고 기술적인 갖가지 시도들에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과 똑 같은 열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981년에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전에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굴드는 변주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보다 큰 전체 속에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파동, 화성, 그리고 근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체들로 해석함으로 이전의 녹음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을 남겼다.
굴드
는 기술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라는 의미에서)이 만들어주는 가능성을 언제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녹음이후 25년간 이루어진 녹음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굴드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재녹음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그의 데뷔 레코딩 곡이기도 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신녹음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된다. 굴드는 이듬해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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