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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병창 [伽倻琴竝唱]
노래와 반주를 한 사람이 겸한 것으로 창이 주가 되고 가야금은 부가 된다. 기원은 남도에서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가 발생할 무렵 함께 발생한 것으로, 당시 가야금산조로 이름을 떨치던 연주가들은 대부분 가야금병창을 겸하였다. 가야금이 노래의 반주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삼현삼죽(三絃三竹)에서 비롯하여, 고려가요 및 조선시대의 가곡에까지 전통을 잇고 있으나 모두 병창은 아니었다. 그 예로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실린 신라시대의 연주형태를 보면 모두 금척(琴尺:가야금잡이) ·무척(舞尺:춤잡이) ·가척(歌尺:노래잡이)으로 구분되어 있어 가야금잡이는 가야금만 탔을 뿐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이처럼 서로 독립되어 있던 금(琴:가야금)과 가(歌:노래)가 조선 후기에 와서 가야금산조의 명인 김창조(金昌祖)와 박팔괘(朴八卦) 들에 의하여 병창이 시도되었다고 하나, 일설에는 그들 이전에 민속악을 연주했던 가야금잡이들에 의하여 이미 시도되고 있었다고 한다. 가야금병창에 부르는 노래들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가나 판소리 중의 한 대목, 또는 민요 등을 가야금의 선율에 맞게 기악화하거나, 가야금의 선율을 노래의 선율에 제주(齊奏)한 것이다. 그러나 가야금은 노래를 따르는 것이 원칙이고 소리가 없는 공간을 기악선율로 메우거나, 가끔 간주를 넣어 흥을 돋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야금병창으로 중요한 레퍼토리는 단가 중 《호남가(湖南歌)》 《녹음방초(綠陰芳草)》 《청석령(靑石嶺) 지나갈제》 《죽장망혜(竹杖芒鞋)》 등이고, 판소리에서는 《춘향가》 중 <사랑가>,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路程記)>, 《수궁가》 중 <고고천변(皐皐天邊)> <가자 어서 가>,/FONT> 등이다. 항상 장구의 반주가 딸린다. 1968년에 산조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고, 예능보유자로는 박귀희(朴貴姬:본명 吳桂花) ·김난초(金蘭草) ·함금덕(咸金德)을 거쳐 정재국(鄭在國)이 지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