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슬 / 김민기 1집
1971년 약관을 갓 넘긴 한 섬세하고 문약해 보이는 청년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내뱉은 조용한 목소리는 그 즉시 대중가요의 판도를 뒤흔들었고 곧 제3공화국 정권에 의해 신화로 사라져갔다.
대중가요사에 있어서 형식적인 면에서의 혁명이 신중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김민기의 치열한 가사 쓰기는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비판과 도전의 메시지를 대중가요계에 또 하나의 화두로 던져놓았다.
자의든 타의든 간결한 멜로디에 얹혀진 시들은 시인을 신화적인 사회운동가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이렇듯 그의 노래들은 미학과 저항성을 따지기 이전에 당시부터 지금까지를 아우르는 저항적 성향의 가요들에 미쳤던 영향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나의 노래가 우리 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아침 이슬>을 비롯한 그의 노래들이 보여주었고 또한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부표처럼 떠도는 어설픈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당시 대학, 즉 지성의 중심에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로서 자리매김했던 이 자그마한 노래들에 대한추모는 바람결을 타고 떠도는 민들레처럼 아직까지도 그 씨앗들을 뿌리고 있다.
(황정)
[김민기 論]
언젠가 방송국에서 민기에게 내가 [김민기 논]을 쓰겠다고 했더니 [김민기 놈]하고 그가 되물어 거기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던 일이 생각난다.
민기는 그렇게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씁씁한 친구다.
그의 노래속엔 대체로 콧대 높고 줏대있는 [젊은 한국]이 도사리고 있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며 오래 기다려야 하는 스튜디오 밖 한구석에 쭈그리고 않아 기타아로 조용히 클레식 소품을 연습해 보던 그의 모습이나, 어느날 오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함빡 비를 맞아 뼈속까지 젖을을 그가 맨발로 내 사무실에 걸어 들어오던 일(그는 금붕어처럼 뻐끔하니 입을 벌린 구두를 한길가에 내 버렸단다)이며 뭇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가면서도 국산품 노래를 외고집하던 일 등등, 그러한 그의 일상 생활은 그의 음악속에 미화되거나 위장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구현되어 있다.
이번 첫 디스크를 위해 특별히 음악적인 헌신을 보여준 정성조 쿼텟과 김광희 양에게 고마움을 금치 못한다. 한마디로 민기는 [복도 많은 놈]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다. 앞으로가 그의 가능성과 창조력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본격적인 [김민기 논]은 그 때 그날로 미루기로 하겠고 끝으로 이 디스크가 민기의 참 가치나 숨은 실력을 알아 볼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많은 분들에게 권한다.
1971. 10. 21.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