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거인 2집 / 김수철

단연 최초의 하드 록 명반이다.
초기 대학가요제 출신의 밴드로서는 활주로, 마그마와 함께 가장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던 그는 1979년 <일곱색깔 무지개>, <내일>, <세월> 등이 담긴 데뷔 음반을 발표했고, 1집의 밴드 체제에서 원 맨 밴드 형식으로 변화하여 이 역사적인 음반을 녹음했다.

그는 신중현 이후의 기타 히어로였고, 대중앞에서는 엔터네이너를 자처했다. 하지만 당시 대중음악계의 판도와 전체적인 수준으로 볼 때 그는 너무 앞선 뮤지션이었고, 그래서 이 음반은 실험적인 앨범으로까지 비추어졌다.
이는 작은거인 1집 수준의 연주와 녹음이 주류였던 당시 우리 음악계의 역량과 90년대에 내놓았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을 훌륭한 완성도를 가진 이 음반 사이에 존재하는 상당한 간극이 만들어낸 현실이었다.
여기에는 후반부를 블루지한 패턴으로 선회하는 하드 록 <새야>, 진정한 실험지향적 연주곡 <어둠 속에서>, 호쾌한 기타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주는 <알면서도>, 1집에 비해 그의 음악적인 역량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리메이크곡 <일곱색깔 무지개> 등 빛나는 트랙들이 실렸다. 이후에도 이런 질감으로 연주하는 뮤지션은 이 당시의 김수철 밖에는 없었다. (박준흠)

명실공히 김수철의 작은거인이 한국 록계의 중심부로 치고 올라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앨범이다.
<새야>와 <일곱색깔 무지개> 등 격정적인 하드 록 풍의 사운드와 재즈적인 풍의 인스트루멘틀 <어둠의 세계> 등 몇몇 수록곡들이 도전적인 의욕으로 가득차 있다.
디스토션이 짙게 걸린 김수철의 기타 사운드와 연주 그리고 멤버들 모두의 뜨거운 호흡은 80년대 초반의 한국 록의 하나의 이정표를 보여주는 듯 하다.

이즈음의 국내 록 메틀 음반으로 본다면 이 앨범은 전반적으로 녹음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김수철

김수철은 대단한 뮤지션이다.
그는 처음에 지미 헨드릭스 연주 스타일의 기타 연주가 담긴 하드록을 지향하였고, 대중적인 뮤지션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당시로서는 너무 특출났고, 시대적으로(우리나라에서!) 너무 앞섰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음악을 온전히 앨범에 담으려면 그의 기타 연주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이드 세션맨들이 있어야 했고, 그의 연주를 이해하고 제대로 녹음할 수 있는 레코딩 엔지니어가 있어야 했는데 당시(1980-1981년)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제대로 평할 매체/평론가와 그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도 거의 전무했다.

당시 세션은 2세대 세션맨들(강근식g, 조원익b, 배수연d, 이호준key 등등)이 거의 모든 세션을 전담하면서 뮤지션들의 음악을 획일화시켰고(이는 이들 세션맨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이겠지만), 그나마 소수의 레코딩 엔지니어들은 뮤지션의 위에서 군림하면서 뮤지션과의 소통을 사실상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뮤지션이 개성 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해도 이런 시스템 앞에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수철이 택한 방법이 'one man band' 스타일로 세션을 자신이 혼자서 하는 것이었고, 레코딩 엔지니어로는 지다가와 마사토라는 일본인을 초빙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이 앨범의 기술적인 완성도는 90년대에 만들어진 록 레코딩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한국 대중음악산업의 전반적인 문제점들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는 뮤지션들의 뮤지션쉽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지금도(새천년이 도래한) 한국 대중음악 시스템의 문제점들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지만 대다수의 뮤지션들은 자신의 표현(창작)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기(신장시키는 것은 둘째치고) 위해서 과연 어떤 현실 발언과 시스템의 변화를 추구하였는지 모르겠다. 폭력적인 정권과 부디칠 수밖에 없는 뮤지션의 현실발언은 개인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자신의 신상이 해로울 수 있는) 사안이므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음반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세션, 레코딩 엔지니어의 문제에는 왜 그리도 무심했는가? (김수철이 1980년에 혼자서 이런 문제를 극복했을 당시 다른 중견 뮤지션들은 뭐했나?)

사실상 이런 문제를 제대로 건드린 것은 따로 또 같이가 2집을 발표한 1984년에 와서이다. 그래서 따로 또 같이의 2집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새로운 시발점이고, 80년대 한국 대중음악 르네상스 시기(그렇게만 부를 수 있다면)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따로 또 같이의 이주원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조용필이 아니고(그는 80년대에 많은 음반을 팔았다. 하지만 그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무엇을 했나? 음반 많이 팔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기억한다고 '국민가수'인가? 같이 음반 많이 판 중국의 최건이나 구소련의 빅토르 최와 비교하면 왜 이리 우리의 '국민가수'는 초라해 보일까? 빅토르 최의 <혈액형>을 들으면 지금도 울컥하는데, 왜 조용필에게서는 그런 노래를 찾을 수 없을까?).

김수철은 정태춘과 같이 시스템을 바꾼 혁명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직업정신'을 가진 뮤지션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직업정신' 이외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작은거인 2집의 탄생이 가능했다. 이 음반은 1979년 발표한 작은거인 1집의 그 김수철이 만든 음반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일취월장의 기량과 음악적인 성숙을 보여주었다. 1집은 단지 아마추어 밴드의 '풋풋한' 앨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하드록을 기조로 국악음계(<별리>), 발라드(<행복>), 실험적인 연주곡(<어둠의 세계>) 등을 도입한 이 앨범은 <새야>, <일곱색깔 무지개>라는 기타 연주 매니아들도 반할만한 곡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있다. 그래서 당시 그를 '한국의 록 기타리스트'로 거론하기도 하였다. 많은 공력이 녹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재기 넘치는(신선한) 그의 기타 연주는 작은하늘, 카리스마에서 보여준 이근형의 연주와 함께 80년대에 압권이었다. 그리고 팝발라드까지 가능한 다양하고 출중한 작곡 능력은 당대 손꼽을만 했다.

하지만 발표 예정이었던 작은거인 3집의 일부곡이 '가사심의'에 반려되면서 3집 출반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고(그렇다고 그의 가사가 반체제적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에 반려이유는 '가사가 비현실적이기에' 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수철은 1983년에 솔로 1집을 발표하면서 팝발라드 가수로 전향을 하였다. 그리고 80년대 초반에 그는 '팝발라드의 황제'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성공스토리를 보여주기 전에 발표한 작은거인 2집 당시가 김수철에게는 가장 가슴 뜨거운 시기였고, 완전한 하드록 연주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 gaseum.com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