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의 추억의 LP이야기

50대가 넘은 중년의 나이에도 미소년의 용모를 잃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김세환은 솜사탕 같은 목소리로 70년대 소녀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포크 팝 계열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토요일 밤','길가에 앉아서','화가 났을까','좋은 걸 어떡해','사랑하는 마음','옛사랑' 등 70년대 청소년들이 열광했던 애창가요를 남겼다. 어두운 구석을 찾을 수 없던 그의 해맑은 미소와 밝고 흥겨운 노래들은 70년대 가난에 그늘진 청소년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또한 포크계열 가수로는 처음으로 2년 연속 가수 왕에 오르며 트로트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그는 1948년 7월 15일 서울 필운동에서 원로 연극배우 김동환씨와 여고 시절 성가대 피아니스트였던 홍순지씨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배재학당 시절 음악이 좋아 취미로 성악을 한 아버지 김동환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가정분위기로 자식들을 키웠다. 김세환은 부친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연예인 2대로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팝송을 좋아했던 형들의 어깨 너머로 많은 외국 곡들을 접했다.

일신초등학교 6학년 소풍 때 닐 세다카의 '오 캐롤'을 우리말로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형들이 다니던 서울중학교에 응시했지만 고배를 들고 2차로 성동중학교에 입학했다. 서울대에 입학하면 오토바이를 사준다고 했던 부친은 큰 아들이 서울대 정외과에 합격하자 고심 끝에 오토바이 대신 색소폰을 선물했다.

집안에 근사한 색소폰이 생기자 큰 형의 친구인 서울고 밴드부장 정성조(현 KBS 악단장)와 둘째 형의 친구 김석원(쌍룡 명예회장)이 자주 놀러왔다. 이 때 김세환은 이들과 어울려 색소폰을 불어보며 처음으로 악기를 만져보았다. 당시 그는 색소폰이 나오는 빌리 본 악단이나 새임 테일러의 '데니 보이' 등을 즐겨 들었다.

보성고 2학년 여름방학 때 대천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비가 내려 숙소에 머물고 있는데한 대학생이 'LONETOWN'이라는 팝송을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하는 모습을 봤다. 놀러 온 모든 여학생들이 선망의 눈초리로 그에게 몰려가는 것을 보고 "서울가면 기타를 무조건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모친은 막내 아들의 간청에 전오승이 제작한 '전음기타'를 구입해 주었다. 당시 김세환의 집은 대학생이던 형들이 이화여대생 친구들을 불러와 댄스파티를 했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기타를 배우러 음악학원에 가려고 했지만 "불량 청소년들이 많다"고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집에서 독학으로 익혔다.
그는 "소풍 때 전교생 중 4, 5명이 기타를 들고 왔다. 벤처스의 '파이프라인' 등을 손이 부르틀 만큼 기타로 치고 놀면서 주법을 배웠다.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지만 정식으로 배우지 못해 지금도 기타실력은 형편없다"고 웃는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수험공부는 뒷전이고 기타만 치고 놀자 큰형이 "기타를 부셔 버린다"고 혼내 마침내 공부를 시작했지만 연세대 경영학과를 낙방하고 재수를 했다.
하지만 공부보다는 대성학원 인근의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각종 콘서트를 구경하는 데 신경을 더 쏟았다. 연세대를 또 떨어진 그는 68년 당시 후기모집이었던 경희대 신문 방송학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음악감상실 전성시대였다. 기성세대들은 '세시봉' 등은 노는 대학생들과 불량 중고생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로웠던 부친도 비슷했다. 김세환은 "당시 아버님은 집에서 음악을 들으라며 원하는 판과 좋은 오디오를 다 사주셨다"고 회상했다.

69년 경희대 2학년 때 바비 달린의 '로스트 러브'로 시민회관에서 열린 TBC TV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했다. 1등은 '캔사스 시티'를 부른 연세대 여학생 이미배가 차지했다.
김세환은 "예선에선 통기타로 좋은 점수를 받아 본선에 나갔는데 이봉조 악단이 반주비를 내라고 해 그냥 통기타로 나섰다가 입상을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떨어진 동양화가 운보의 아들인 연세대 치대생 김운호, 홍대 조각과에 재학중이던 장계현과 만나 70년 3인조 통기타 트리오 '트리플'을 결성했다. 출연료 문제로 가수들이 파업을 벌이자 대타로 TBC 모닝쇼 등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1년 간 대학축제무대에서 포 시즌의 '렉돌(RAG DOLL)' 등 번안곡들을 부르며 활동했지만 김운호의 군입대로 팀은 해체됐다.

그는 71년 경희대 교내행사에서 만난 윤형주와 듀엣으로 붙어 다니며 대학가의 인기가수로 명성을 쌓아갔다. 두 사람은 71년 최경식이 기획한 시민회관의 '훗트네니 고고고!' 무대에 비지스의 'DON'T FORGET TO REMEMBER'를 부르며 첫 일반무대에 섰다.

이들을 눈여겨본 DJ 이종환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에 윤형주를 초청했다.
윤형주는 김세환을 불러 함께 출연했다. 이후 비지스의 노래보다 김세환 윤형주 듀엣이 부른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신청엽서가 폭주했다.
자신감을 얻은 김세환은 중국대사관 앞 성보다방에서 윤형주, 조동진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송창식 이장희 등 포크가수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명동의 '오비스 케빈' 등 서울 도심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DJ 이종환이 음반제작을 제의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71년 윤형주와 함께 데뷔음반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OL3'을 발표했다. 김세환은 학사가수라는 신선함과 연예인 2세라는 후광 덕에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단독으로 재킷 모델로 등장한 VOL4에 담긴 '오솔길'에는 사연이 있다. 한 재일 교포에게서 일본말로 배운 노래를 번안해 가장 먼저 방송에서 노래했지만 출연업소 '금수강산'에 은희가 찾아와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취입을 앞둔지라 거절했지만 가사만 조금 바꿔 '꽃반지 끼고'라고 먼저 취입을 해버렸다. 그는 "내가 표절하게 된 꼴이 되었다"고 숨겨진 이야기를 전했다.

첫 독집 '김세환 노래모음-유니버샬'에 수록된 타이틀 곡 '옛친구'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전국에서 건전 가사를 공모해 노래말로 택한 이 노래는 1972년 TBC방송가요대상과 MBC 10대가수상에서 남자 신인상을 안겨주었다. 김세환은 "아르바이트 가수시절 20만원이던 개런티도 상을 받자 75만원으로 4배가까이 뛰었다. 이후 노래를 해 번 돈으로 75년 막 개발붐이 일기 시작한 강남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게 내 재테크의 시작이 되었지만 30년이 넘도록 가수라는 직업으로 살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하이틴의 최고 스타로 부상한 그에게 영화출연 제의가 밀려들었다. 그는 신성일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과 '맹물로 가는 자동차', 신상옥 감독의 뮤지컬 '아이 러브 마마' 등 영화 뿐 아니라 예그린 뮤지컬 '우리 여기 왔다'에서 하춘화와 함께 공연을 했다.
또한 코미디 프로에도 진출해 서영춘, 이주일과 함께 열연하며 만능 엔터테이너의 재능을 과시했다.
74년 김세환은 MBC 10대가수상과 더불어 10회 TBC방송가요대상의 가수 왕에 등극하며 가요계 최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1975년 6월 '가수 김세환-탤런트 서미경 열애설'이란 스캔들 기사가 언론을 강타했다.
당시 안양예고생이었던 서미경과 영화 '아이 러브 마마'에 함께 출연하면서 같은 학교 여고생들의 시샘이 빚어낸 해프닝이었지만 소문에 소문을 불려가며 한동안 장안을 뜨겁게 달궜을 만큼 김세환의 인기를 반증해주는 사건이었다.
김세환은 "나중엔 애까지 낳았다고 소문이 돌았다"며 곤혹스러웠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1975년에도 TBC의 가수 왕에 올라 포크가수로는 처음으로 2년 연속 권좌에 오르는 진 기록을 세웠다. "가수들에 대한 전국인기투표에서 김세환이 단연 최고였다"는 최희준의 말처럼 전속사인 신세계와 지구레코드 간의 치열한 스카우트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김세환은 인척인 성음제작소 나현구사장에 이끌려 전속을 옮긴 후 두 번째 독집을 발표하며 인기가도를 달렸다. 1976년 가수왕 3연패를 목전에 두고 뒤늦게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벌금 10만원형과 활동금지의 족쇄를 찼다. 공백기인 78년 9월 활동금지 상태였지만 인기가 여전했던 그의 결혼소식에 소녀 팬들은 경악했다.
실제로 한 여자 팬은 그의 디스크와 액자 속의 사진을 박살을 내 소포로 보내오기도 했다. 전성기에 소형 냉장고 박스로 4개나 되는 팬레터와 선물공세를 받았던 김세환은 "중2였던 윤석화도 내 팬이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 그 많던 팬 레터가 딱 끊어졌다"고 웃는다.

해금이 되자 "통기타로는 돈이 안 된다"는 성음 나사장의 권유로 그는 80년 5월 '어느 날 오후' 등이 수록된 디스코 트로트 풍의 컴백앨범을 발표하고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다. 부산에서 시작으로 '어느 날 오후'는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이후 성음 나사장의 기획으로 '추억의 팝송' 1집과 81년 엄진의 기획으로 히트곡 모음집을 발매했지만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김세환은 "뽕짝조의 노래가 취입할 때도 어색했다. 너무 줏대 없이 인정에 끌려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는다.

82년 9월부터 6개월 간 송창식,윤형주와 공동진행을 맡았던 KBS 2TV의 심야음악프로 '노래는 친구'는 새로운 음악방향으로 그를 인도했다.
83년 이들은 김세환과 절친한 김석원 쌍룡명예회장의 지원으로 9,000만원의 제작비를 투입, 일본에서 반주녹음을 해 '하나의 결이 되어'라는 공동앨범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나인프로덕션을 만들어 음반제작자로 나서고 89년엔 KBS 1TV '쇼 특급' MC, 91년엔 역삼동에 일식당 '모리스시'를 개업해 사업가로 변신한 김세환은 93년에 가족3대가 생명보험협회 기업광고 모델로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00년 송창식, 윤형주에 양희은이 가세한 빅4 콘서트 이후 끊임없이 통기타 음악의 부활을 주도하고 있는 그는 "솔직히 나를 포크가수라 하면 낯이 뜨겁다. 팝 가수가 맞다. 연변가수 한국화의 '울고 말았오'라는 트로트 곡을 딱 한번 작곡했지만 삶과 사랑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은 갈증을 느끼지는 못했다.
나는 마이너보다 밝고 흥겨운 메이저노래가 좋다. 가수 영화 코미디 뮤지컬 CM MC 등 다양한 활동경험을 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비록 자신의 음악세계를 표현하는 창작품은 없었지만 70년대 젊은이들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쳤던 김세환의 흥겨운 노래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명예의 전당에서 빠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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