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oading...
  • Loading...
명치 끝에 박혀버린 멜로디의 파편들

케빈 컨의 다섯 번째 앨범 Embracing the Wind의 국내반은 가을 문턱으로 접어드는 2002년 여름이 되어서야 소개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2001년 겨울에 발표되었다.
데뷔 이후 매년 한 장씩 신보를 발표하던 케빈 컨은 처음으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 만든 이 앨범으로 미국 뉴에이지 음악계에서 보다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되었고, 아울러 그의 신보를 기다려온 팬들이 치러냈던 기다림의 고통이 결코 아깝지 않을 만큼 충분한 완성도와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 내고 있다.

서정적인 선율에 실어 나르는 강렬하고 인상적인, 손에 잡힐 듯이 명확한 이미지들은 마치 윤곽선이 뚜렷한 수채화를 감상하는 느낌을 던져주는데. 케빈 컨의 이런 특출한 음악적 능력은 그가 오랜 시간 다듬어온 음악적 역량에 시각 장애인 특유의 섬세한 이미지 구현 능력이 보태진 결과라 여겨진다.

신디사이저 음을 흩뿌리듯 조심스럽게 던지며 시작하는 첫 번째 트랙 `Blossom on the Wind`는 아련한 봄의 향기를 풍기며 다가옵니다.
아직 찬 기운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봄바람에 분분히 날리는 벚꽃의 죽음, 그 비장한 아름다움이 만져질 듯이 그려집니다. 아름답게, 슬프게, 느리게 `바람을 껴안아`갑니다.
`Through Your Eyes`라는 그닥 비범할 리 없는 제목이 새삼 케빈의 장애와 오버랩되어 가슴 한 쪽을 시리게 만드는 두 번째 트랙은 앨범을 통틀어 가장 밝은 분위기의 곡으로 어쿠스틱 기타와 중음역대의 피아노가 미디엄 템포 위를 부드럽게 왈츠를 추듯 미끄러져 갑니다.
이어 우리가 뉴에이지라는 음악을 듣는 이유이자 목적의 다른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Childhood Remembered`입니다.

이 아름다운 음악은 제가 사용하려는 어떠한 수사도 순식간에 초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아주 오랫동안 들어온 듯한 익숙하고 간결한 멜로디 라인에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비명과 부드럽게 가슴을 쓸어 내리는 케빈의 피아노가 빚어내는 조화는 어느새 듣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비가 오는 날, 괜스레 사는 게 슬퍼지는 날, 떨어져 있는 연인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날...... 이런 날들에는 이 곡을 절대 듣지 마시길 바랍니다.
슬픔은 카타르시스를 넘어 어쩌면 아물지 않을 상처가 될 테니까요. 이 곡의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지독한 것입니다.

슬픔의 상처를 예감한 듯 `The Silence of Knowing`은 다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나갑니다.
5월의 햇살을 손안에 움켜쥔 것 같은 따스함은 여섯 번째 곡인 `Bathed in the Dawns Light`으로 이어집니다.
`Through Your Eyes`에 이어 다시 등장하는 어쿠스틱 기타는 소박하지만, 인상적인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두 곡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Above the Clouds`는 제목처럼 구름 한 점이 잠깐 햇살을 은은하게 가린 듯한 그런 느낌의 곡입니다.

2001년 6월,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From This Day Forward`는 화려한 장식이라곤 찾을 길 없지만, 그 섬세한 멜로디 라인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인, 전형적인 케빈 컨의 피아노 연주곡입니다.

복잡하지 않은 화성, 간결한 진행, 부드럽고 간결한 터치는 그의 따뜻한 영혼의 음악적 표현으로 자리합니다. 어쿠스틱 기타가 마치 산들바람처럼 밀려드는 `A Secret Grove`에서 케빈의 피아노는 그 바람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조화는 케빈 컨의 음악 영토를 조금 더 넓혀 놓습니다.

앨범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두 곡은 자장가와 속삭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일체의 세션 없이 케빈의 피아노로만 이루어진 `Fantasias Lullaby`는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평화로웠던, 그 작은 공간에서 충분히 행복했던 순수의 시간을 그립게 만듭니다. 아주 예쁘고 달콤한 안락의 멜로디입니다.

마지막 곡 `A Gentle Whisper`는 짧고 불안한 구절을 반복하며 시작합니다.
되풀이될 때마다 그 구절엔 약간의 장식이 추가되고, 조금 더 길어집니다. 어느 순간 하나의 단락이 됩니다.
변화의 색이 더 짙어질 무렵 그리고 조금 더 물들어갈 때쯤 갑작스럽게 끝을 맺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그래서 더 인상적인 결말은 당연히 더 긴 여운을 남겨 놓습니다.
글 : 핫트랙스 최종필